[조남규의 미국정치이야기](15)클린턴과 샌더스의 노선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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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2008년 오바마를 지원했듯이 샌더스도 그래야 한다.”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을 굳힌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이 최근 경선 완주를 고집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에게 한 마디 던졌다. 클린턴 전 장관은 다음달 7일 캘리포니아 등 6개주 경선이 끝나면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면 샌더스 의원은 결과에 승복하고 전당대회 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메시지다.

2008년 민주당 경선 당시 클린턴은 그렇게 했다.

버락 오바마 후보는 그 해 6월 3일 승부를 결정지었다. 초선 상원의원에 불과했던 오바마의 승리는 놀라운 것이었다. 오바마는 ‘변화’와 ‘희망’을 외치며 민주당 대주주인 정치 거물 클린턴을 쓰러 뜨렸다. 4일 뒤 클린턴은 승복 연설을 했다. 클린턴 캠프 내에서는 “전당대회 경선까지 가자”, “지지 선언하기 전에 오바마 측과 대선 공약 등을 놓고 협상을 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클린턴은 승복 결단을 내렸다. 워싱턴포스트 정치전문기자인 댄 볼츠의 저서 ‘THE BATTLE FOR AMERICA 2008’에 당시 정황이 실려있다.

결단을 내리기 전에 클린턴은 선거 참모들을 돌아보며 “오바마가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에 맞서)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때 한 참모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돕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참모는 반대 의견을 폈다. “본선에선 더 혹독한 검증에 시달릴 것이고, 오바마는 배겨내지 못할 것입니다.” 클린턴은 오바마를 돕기로 결정했다.

2008년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버락 오바마(오른쪽)는 민주당 경선 맞수였던 힐러리 클린턴을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2008년 6월7일. 클린턴은 지지자들에게 오바마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는 지지 연설을 했다. 그 자신도 오바마가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헌신할 것이라고 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꿈꿨던 클린턴이 다음 문장을 읽어내려갔을 때, 수많은 지지자들의 눈이 붉게 충혈됐다.

“우리는 비록 이번에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하 유리 천장을 깨뜨리지 못했지만, 여러분들 덕분에 그 천장에 1800만개의 금(민주당 경선 참여 유권자 가운데 약 1772만명이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다)을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이전 같지 않을 것이다. 그 빛은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다음 번에는 이 길을 더 쉽게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바마를 도운 클린턴은 오바마 정부의 국무장관에 임명됐다. 세계를 경영하는 제국인 미국에서 국무장관은 부통령 못지않은 자리다. 클린턴급의 인사에게는 대권을 준비하기에 안성맞춤의 자리다. 경선 승복에 대한 보답 차원의 인사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클린턴은 8년을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2008년 승복 연설 그대로, 이번에는 더 쉽게 민주당 대선 후보 지위를 사실상 확정지었다. ‘샌더스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지만 적어도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번에는 클린턴 차례”라는 무언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2008년 경선 당시 ‘오바마 바람’에 휩쓸려 오랜 친구 클린턴을 배신했던 흑인들이 이번에는 빚을 갚는 심정으로 클린턴을 전폭적으로 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지지 의사를 숨기지 않고 있다 .

경선 패배가 굳어진 샌더스도 클린턴의 길을 따를 것인가.

샌더스는 2008년 당시 조건없이 오바마를 지지했던 클린턴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만 75세인 샌더스가 또 대선에 출마할 일은 없을 것이다. 클린턴 정부가 출범한다해도 샌더스와는 무관하다.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를 자처하는 그가 추구하는 유일한 가치는 미국 사회의 진보화다. 그는 민주당 좌파 보다 급진적이다.(샌더스는 물론 대다수 샌더스 지지자들도 자신들을 민주당원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샌더스는 클린턴에 버금가는 경선 성적표(샌더스는 민주당 경선 규정이 공정했다면 자신이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를 내밀며 노선 투쟁에 돌입했다. 오는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공표될 민주당 대선 공약에 자신의 공약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것이다. 사실상 경선 패배가 확실시된 이후에도 샌더스가 경선 완주를 고집하고 있는 이유다. 그는 클린턴과 민주당을 향해 “본선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의 표를 얻으려면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래는 뉴욕타임스(NYT)가 집계한 28일 현재 클린턴과 샌더스가 확보한 대의원 숫자다.
 


민주당 유력 인사들인 '슈퍼 대의원(Superdelegates)'들이 대부분 클린턴 지지를 선언한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 경선룰이 클린턴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샌더스의 밑바닥 지지세는 클린턴 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008년 오바마를 지지했던 젊은층은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 대신 샌더스를 밀고 있다. 젊은층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주진 않겠지만, 클린턴과 샌더스의 갈등이 원만히 조율되지 않으면 대거 투표에 불참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픽은 하버드대 정치연구소(IOP)가 지난 4월 18~29세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조사에서 샌더스는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호감 응답률에서 비호감 응답률을 뺀 순호감도 수치는 +23을 기록, 유일하게 +값을 얻었다.

샌더스는 비록 민주당 후보지명이 어렵게됐지만 미국의 젊은층을 대거 민주당으로 견인, 향후 미국 정치의 지형도가 민주당에 유리하게 그려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29세 젊은층을 상대로 한 IOP 조사에서는 최근 5년 만에 처음으로 민주당원이라는 응답자가 무당파라고 답한 응답자 보다 많았다.


젊은층의 민주당화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 샌더스다. 샌더스 지지자들을 끌어 안지않고서는 클린턴의 대선 승리가 힘들어 진다.
아래는 민주당 경선에 참여한 샌더스 지지자들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출구조사 결과다.

샌더스 지지표의 상당수가 무당파 표임을 보여준다. 샌더스가 흔쾌히 클린턴 지지를 선언하지 않으면 무당파가 트럼프로 기울거나 아예 투표장을 찾지 않을 수 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샌더스가 내세운 공약 중에는 진보 성향의 민주당원들조차 부담을 느끼는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국공립 대학 학비는 전액 국가가 지원하고 국민의 의료비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바마 대통령이 치적으로 내세우는 의료보험개혁(오바마 케어)도 반쪽 짜리 개혁으로 치부한다. 최저임금은 연방정부 차원에서 시간당 15달러로 인상하고 실업 급여지급 기간도 지금 보다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큰 방향에서 북유럽형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민주당 유력 인사들인 '슈퍼 대의원(Superdelegates)'들이 대부분 클린턴 지지를 선언한 점을 고려하면, 민주당 경선룰이 클린턴에게 유리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샌더스의 밑바닥 지지세는 클린턴 보다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2008년 오바마를 지지했던 젊은층은 이번 대선에서 클린턴 대신 샌더스를 밀고 있다. 젊은층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에게 표를 주진 않겠지만, 클린턴과 샌더스의 갈등이 원만히 조율되지 않으면 대거 투표에 불참할 수 있다. 아래 그래픽은 하버드대 정치연구소(IOP)가 지난 4월 18~29세 미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다.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조사에서 샌더스는 압도적인 1위에 올랐다. 호감 응답률에서 비호감 응답률을 뺀 순호감도 수치는 +23을 기록, 유일하게 +값을 얻었다.

이런 공약들을 이행하기 위한 자금은? 증세다. 특히 샌더스는 고소득자의 소득세율을 대폭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등 공화당 행정부가 단행한 감세 조치도 즉각 중단하고 상속세율과 이자·배당 소득에 대한 세금도 인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클린턴은 이번 경선 과정에서 2008년 경선 때 보다는 진보적인 공약을 선보였다. 고소득자 세율 인상을 포함한 세제개혁 추진과 노조 교섭력 강화 입장을 밝혔다. 국무장관 시절에는 오바마 대통령을 도와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FTA 체결에 힘썼으나 경선 과정에서는 FTA 입장이 바뀌었다.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은 찬성에서 반대로 선회했다. 자유무역으로 미국인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있다는 샌더스의 주장에 수많은 유권자들이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도 자유무역과 관련해선 샌더스와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거센 ‘샌더스 바람’이 클린턴을 좌측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은 시간당 최저임금을 15달러로 인상하거나 국공립대 학비를 국비로 지원하는 공약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오바마케어도 폐지하기 보다는 현 수준에서 개선해나가는 게 합리적이라는 입장이다. 한 마디로 클린턴은 점진적이고 샌더스는 급진적이다. 
  두 후보 사이의 차이는 공약의 문제만은 아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뢰의 부족이다. 샌더스는 클린턴을 믿지 못한다. 클린턴이 대기업과 월가 등의 정치자금에 포획돼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린턴은 미국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근본적 개혁을 해낼 수 없다고 샌더스는 비판한다. 아래는 지난 23일 현재까지 정치 자금 추적 단체인 '오픈시크릿'이 집계한 선거자금 모금 실적이다. 

그래픽의 윗쪽 막대선은 선거캠프 밖에서 모금한 자금이고 아랫쪽 막대선은 선거 캠프에서 자체적으로 모금한 자금이다. 클린턴은 샌더스에 비해 외부 자금이 훨씬 많다. 외부의 누군가 돈을 모은 뒤 클린턴을 위해 사용했다는 의미다. 샌더스는 월가의 대형 금융회사나 대기업의 돈이 클린턴 캠페인에 흘러들었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그렇다. <2회, ‘선거자금으로 풀어본 미국 대선’ 참고>

클린턴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샌더스는 문서로 보장받길 원한다. 민주당이 전당대회에서 발표하는 대선 공약이 그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는 샌더스 지지자들의 전당대회 난동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샌더스 측에 대폭 양보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선 공약을 마련하는 위원회에 샌더스 측 인사를 대거 참여시키기로 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대선후보 지명전은 클린턴의 승리로 굳어졌지만 공약 투쟁은 지금부터다. 두 후보가 갈등을 여하히 봉합하느냐에 클린턴 대선 승패가 달렸다.

조남규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