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05-29 14:19:18
기사수정 2016-05-29 14:19:18
조선·해운 상황 생각보다 심각…빅배스 없이도 적자날 판
농협중앙회 수익센터 역할 때문에 예전에도 결단 못내려
STX조선해양이 결국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NH농협금융그룹이 고민에 빠졌다.
잠재부실을 한꺼번에 털어내는 ‘빅배스’를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잠재부실이 아닌 드러난 부실만으로도 대손충당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빅배스’를 하지 않더라도 당장 적자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농협의 수익센터로서의 역할에도 금이 갈 수 있어 “농협금융이 실제로 ‘빅배스’를 택하긴 힘들 것”이란 전망이 힘을 받는 분위기다.
빅배스(big bath)는 목욕을 해서 때를 씻어내는 것을 빗댄 말로 기업이 과거에 쌓인 부실요인을 한 회계연도에 모두 반영하는 회계기법을 말한다. 기업에서 최고경영자(CEO) 교체 시기에 후임 CEO가 빅배스를 하는 경우가 많다.
김용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은 지난 3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조선, 해운 등 5개 취약업종의 부실채권을 ‘빅배스’를 통해 단숨에 정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대손충당금 급증으로 단기적으로 이익이 급감하거나 설혹 적자에 이르더라도 이를 감수해야 한다”며 “이번에 정리하면 차후 회수된 대출이 이익으로 환입돼 실적 반등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실위험 여신에 대한 검토를 끝내기도 전에 이들이 무더기로 현실화 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빅배스’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올해 1분기에 이미 창명해운(1944억원), STX(413억원), 현대상선(247억원) 등의 부실이 연달아 터지면서 농협금융의 대손충당금은 3575억원을 기록, 전년동기 대비 57% 급증했다.
게다가 지난해 농협금융에 약 5000억원의 대손충당금을 안긴 STX조선해양이 최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현재 남아 있는 NH농협은행의 관련 여신이 7700억원에 달하므로 또 다시 수천억원의 대손충당금 적립이 불가피한 상태다. 법정관리의 경우 여신의 99%까지, 만약 파산한다면 100% 대손충당금을 적립해야 한다.
특히 STX조선 측에 제공한 선수금환급보증(RG) 4300억원은 전액 손실이 될 위험이 크다. 만약 배를 주문한 선주사들이 선수금 환급을 요청하는 RG콜을 발동할 경우 이 돈을 채권은행이 전부 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STX조선 채권단 관계자는 "최근 해운시장이 안 좋아 배를 인도받아도 마땅히 굴릴 곳이 없으므로 선주사들이 투입한 돈을 돌려 달라고 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그밖에도 대우조선해양, 성동조선, 현대상선, 한진해운 등 첩첩산중이다.
무엇보다 조선업계에 너무 많은 RG를 제공한 것이 두통거리다. 농협은행의 조선업계 관련 여신은 대우조선해양 1조5000억원, STX조선 7700억원, 성동조선 2600억원 등 총 2조5300억원인데, 이 중 약 2조원이 RG인 것으로 알려졌다. 자칫 RG만으로도 조 단위의 손실을 볼 수 있는 상태다.
물론 대우조선해양과 성동조선이 힘들게라도 버텨나가 선주사들에게 배를 인도하면, 농협은행은 RG콜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두 회사 모두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고 있는 탓에 "결국 STX조선과 비슷한 길을 걷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세계적으로 조선업계와 해운업계의 업황이 너무 나쁘다”며 “조선사와 해운사 채권이 많은 농협은행은 지속적으로 부실여신에 시달릴 위험이 높다”고 진단했다.
일단 농협금융은 "빅배스와 관련해 내부적으로 농협중앙회와 의논 중"이라며 원론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금융권에서는 “농협금융이 잠재부실까지 털어내기에는 여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3월말 현재 82.7%에 불과한 농협금융의 대손충당금적립률을 타 금융그룹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약 2조5000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며 “이 돈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아울러 농협금융이 ‘농협의 수익센터’로서의 역할도 고려해야 한다. 농협금융은 2012년 4351억원, 2013년 4535억원, 2014년 3318억원, 2015년 3526억원 등 지난 4년간 총 1조5730억원의 명칭사용료를 농협중앙회에 납부했다.
이 돈은 대부분 경제사업 활성화에 쓰였으며, 그 외에도 농협금융은 여러 모로 경제사업과 농민들을 돕고 있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과거에도 농협금융은 어떻게든 수익을 내 경제사업을 지원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빅배스’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올해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고 말했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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