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국가 브랜드 논란’에 빠진 것

매미 울음소리 가득한 정동 서울시립미술관에선 올여름 ‘백남준과 플럭서스’ 전시를 한다. 새 시대를 연 천재 작가와 그에게 영감을 준 미국 작가 그룹 ‘플럭서스’의 발랄한 상상력이 가득한 전시다. 지난 주말, 전시회엔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이 많았다. 순수한 상상력을 훔쳐보려고 슬그머니 그들 뒤에 섰다. 하지만 기대는 곧 어긋났다. 인솔자는 작품 앞에서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백남준은 미디어아트의 선구자야, 1960년대…” 칠십 노구에도 아이의 눈을 가졌다던 작가의 창의성 집결 앞에 펼쳐진 비창의적 광경에 당황했다. 그리고 오랜 내 열등감을 들여다봤다.

학생을 ‘모범생과 문제아’로 분류하는 틀 속에서 ‘모범생’이었던 나는 ‘문제아’에 상대적으로 가까운 친구들이 보여주는 창의를 몰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모범생’은 작품보다 해설에 더 집중해야 했다. 정답을 찾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작품 자체에 집중한 건 20대 이후 내 필요에 의해서였다. 스스로가 아닌 교과서의 요구대로 느꼈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했다. 우리는 수학 문제 하나를 풀어도 새로운 방식보다 해답을 착실하게 따라가길 요구받았다.

홍주형 정치부 기자
국가브랜드 ‘크리에이티브 코리아(CREATIVE KOREA)’가 프랑스 브랜드를 베꼈다는 논란에서 나는 초점이 잘못됐다고 느꼈다. 누구도 왜 이런 논란이 일어났는지를 얘기하지 않았다. 표절 여부엔 관심이 많았지만, 창의를 국가브랜드로 삼을 때 정책결정자들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크리에이티브’에 집중했다면 표절 의혹이 생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정책결정자는 창의에 인색한 우리 사회를 전반적으로 성찰해본 일이 있을까. 창의가 산업가치로만 평가된 것은 아니었는지, 크리에이티브 코리아 논란에서 빠져있는 고민이다.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나는 창의가 자아와 낯선 외부환경 사이의 균열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백남준이 없었으면 플럭서스가 없었을 것이고, 플럭서스가 없었으면 백남준이 없었을 것’이라고들 한다. 백남준과 플럭서스는 다른 문화에 속하지만 기꺼이 맞부딪혀 서로의 창의를 키웠다. 창의적이지 않은 예술이 모방일 뿐이듯 익숙함을 벗지 못하는 사람과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우리 문화정책이 문화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창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돼야 하는 이유다.

백남준처럼 스스로 돌출한 거장 혹은 브랜드에 열광할 게 아니고 여러 백남준을 낳고 품을 수 있는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정책결정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창의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인식하고, 창의를 확장하며 저항을 줄여나가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혜안이다.

작가로서 백남준의 마지막 시간을 지켜본 한 큐레이터는 그 눈의 순수함을 얘기했다. 마지막까지 아이의 눈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는 죽는 날까지 창의적이었다. 아이의 눈을 너무 일찍 빼앗지 않도록, 혹은 나이가 들어서도 아이의 눈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크리에이티브 코리아는 그 눈을 존중하고 키워주는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홍주형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