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기획] 아파트 터치패드 출입문…시각장애인엔 '난공불락' 성문

15일 '흰 지팡이의 날'… 외면받는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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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끝에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흰지팡이의 날’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의 한 임대주택단지에서 건물 입구의 출입기기를 조작하던 1급 시각장애인 손모(여)씨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최근 입주를 시작한 이 아파트의 인터폰 등 출입기기가 터치패드 방식으로 설치됐기 때문이다. 이 아파트는 단지 전체가 LH(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BF(Barrier Free·장애물 없는 환경)인증을 받은 곳이다. 노약자와 장애인 등 거동이 불편한 사회적 약자들도 편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공증을 받았지만 시각장애인은 출입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생활의 편리와 안전을 위해 설치된 디지털 기기나 시설물들이 장애인에게는 불편하고 위험투성이인 게 적지 않다.

한 시각장애인(1급)이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의 한 임대아파트단지에서 건물 입구의 출입기기를 조작하던 중 버튼 방식이 아닌 터치패드 방식인 탓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37번째 흰지팡이의 날(15일)을 맞는 시각장애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날은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1980년 시각장애인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고 관심을 촉구하고자 제정한 날이다. 흰지팡이는 시각장애인의 자립과 성취를 상징한다.

서울역 지하보도에 조성된 캐리어용 경사로.
아예 앞이 안 보이거나 시력이 몹시 낮은 경우 등 전국 128만 시각장애인은 비장애인에게는 편한 세상을 불편하게 마주해야 할 때가 많다. 서울역 지하보도의 계단 한쪽에 설치된 캐리어(여행용가방) 경사로만 해도 그렇다. 경사로는 이용자들이 무거운 캐리어를 편하게 운반하도록 한 것이지만 경사로 각도가 20도를 넘어 시각장애인들에는 가파르게 느껴질 수 있고 자칫하다 넘어져 구르게 할 수도 있다. ‘시각장애인은 무조건 눈이 안 보일 것’이라고 오인한 탓에 70% 이상을 차지하는 저시력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다. 서울지하철 9호선의 화장실 픽토그램(사물, 시설 등을 누구나 쉽게 알아보도록 상징적으로 나타낸 디자인)은 진회색 바탕에 흰색으로 남녀 화장실을 구분하고 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이지만 저시력 장애인에게는 남녀 구분이 쉽지 않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픽토그램을 화장실 벽면 전체 크기로 키우고 파랑과 빨강으로 남녀를 구분한 지하철 역사도 있지만 노선이나 역에 따라 크기와 색깔 구분이 천차만별이다.


서울역 화장실의 픽토그램.
한 시각장애인(1급)이 서울 여의도의 국회의사당역에서 화장실 픽토그램을 잘 구분하지 못해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보행자 안전을 위해 인도에 자동차의 진입을 막으려고 설치한 볼라드 역시 시각장애인에게는 ‘보도 위의 폭탄’과 같다. 볼라드는 탄력성 재질로 만들어지고, 인도 위 점자블록의 흐름을 막지 않아야 하지만 감독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시각장애인들의 보행에 지장을 주고 안전도 위협한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의사당역 인근의 보도에서 한 시각장애인(1급)이 점자블록을 가로막은 석재 볼라드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도시 환경 개선 시 장애인을 배려하고 석재 볼라드 등 불법 시설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