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0-20 00:57:12
기사수정 2016-10-20 01:06:22
2013년 8월 초 새누리당 친박(친박근혜)계 중진의원은 저녁을 함께하자는 허태열 대통령 비서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 들어선 허 실장은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였다. 소주와 맥주를 주문해 ‘소폭’을 연거푸 들이켠 허 실장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통령을 좀처럼 만날 수가 없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 후 허 실장 뒤를 이었다가 물러난 다른 두 명의 비서실장 주변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들린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는 게 가뭄에 콩 나듯 어려웠다는 소리다. 비서실장이 정국수습책을 만들어 보고하려고 했더니 부속실에 맡겨 놓으라는 대답만 돌아와 당혹스러웠다는 말도 들린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했던 새누리당 의원은 당시 언론 배포용 프로필에 써 넣을 ‘친한 친구’를 물었다. 이에 박 후보는 ‘친한 친구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로필의 ‘친한 친구’칸은 비워 놓았다는 게 이 의원의 설명이다.
현 정부 출범 후 박 대통령이 누구와 만나 현안을 논의하고, 여론을 청취 하나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대통령과 자주 만나야 하는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 부처 장관, 새누리당 의원들이 도통 대통령을 만날 수 없다고 푸념과 불만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대통령이 극히 제한된 소수와만 만난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등장한 인물이 이른바 ‘청와대 3인방’이고 최순실씨다. 얼마 전 한 야당 의원은 최씨가 대통령에게 액세서리를 사주곤 한다고 주장했는데, 2013년에도 대통령의 경남 거제 저도 여름휴가에 최씨가 동행했고, 페이스북 사진에 등장하는 동남아풍 바틱(Batic) 염색 치마도 최씨가 사줬다는 소문이 돌았다.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에서 박 대통령 국정지지율은 26%로 떨어졌다. 정권이 국민 신뢰를 잃는 가장 큰 이유는 ‘무능’(無能)과 ‘불의’(不義) 때문이다. 경제 분야에서 이 정권의 성적표는 한심한 수준이다. 도처에서 경제위기 조짐이 이어지고 살기 힘들다는 서민들의 소리가 터져나오는데, 이 정부는 아무런 처방을 못 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북한발(發) 안보위기에도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게 영 미덥지 않다.
비선 실세로 지목돼 온 최씨가 돈과 권력을 탐한 의혹이 불거지며 이 정권에는 ‘무능’에 ‘불의’의 그림자도 겹쳐 드리우기 시작했다. 미르·K스포츠 재단과 최씨 딸의 이화여대 특혜 의혹에서는 권력이 농간을 부린 고약한 냄새가 난다.
박 대통령은 최씨 의혹에 침묵하고 있는데, 서둘러 쓴소리 하는 사람도 만나 시중 여론이 얼마나 흉흉한가를 가감없이 들어야 한다. 그리고 세간에 제기된 의혹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깨끗이 해명이 안 되면 환부를 서둘러 도려내야 한다. 19일 새누리당 공개회의에서도 최씨 의혹을 규명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화여대 총장은 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은 권력의 힘이 남아 있어 쉬쉬하고 틀어막을 수 있지만, 내년이든 퇴임 후든 최씨 의혹은 다시 터져나올 것이다. 미르재단과 이화여대에서 계속 시끄러운 소리가 나오면 대통령 지지율은 더 떨어질 것이다. 의혹을 털어내야 동력을 얻을 수 있고 경제분야에서 성과를 내야만 지지율 반등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매사에 물러나는 법이 없어 보이지만 위기라고 생각될 때는 유연해졌고 변화를 시도했다. 지금이 바로 그 위기다.
박창억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