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0-29 12:36:38
기사수정 2016-11-23 10:38:20
2012년 6월 26일, 이명박 정부는 국무회의에 어떤 안건을 기습 상정해 비공개 의결했다. 일본과 1년여 동안 협의한 끝에 완성된 협정을 승인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협정 의결 사실과 그 내용이 세계일보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자 “국민 여론을 무시한 밀실추진”이라는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정부는 6월 29일 일본의 반발과 재촉에도 불구하고 양국간 서명을 1시간 앞둔 시점에서 체결을 무기 연기했다. 이 일로 GSOMIA를 추진한 김태효 당시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이 사임하고 주무부처인 외교부는 거센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다. 이명박 정부의 외교 참사 중 하나로 기록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파문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6년 10월 27일. 위안부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한 국민 여론이 2012년과 달라지지 않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GSOMIA 논의를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올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실시하고 20여발의 탄도미사일을 발사한 상황에서 한일간 군사정보 공유를 더욱 효율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게 국방부의 설명이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최순실 게이트’로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예민한 안보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군인답지 못한 태도라는 비판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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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3 요격미사일을 발사하는 미 이지스구축함. 미 해군 제공 |
‘최순실 게이트’가 국정 전반에 엄청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국방부가 “가능한 이른 시기에 체결한다”는 입장까지 밝히면서 GSOMIA를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한국과 일본의 군사 동맹국인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 국방부 “안보협력 필요”, 야권 “국면전환용”
국방부의 GSOMIA 논의 재개 발표 다음날인 28일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GSOMIA 추진을 놓고 국방부와 의원들간에 격론이 벌어졌다.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북한 핵위협이 고도화되고 일본과 군사정보 협력의 필요성이 높아져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이 주도하는 미사일 방어(MD)에 한국을 포함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것 아니냐”는 새누리당 이철규 의원의 질문에는 “우리의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 논의를 재개하는 것이며 미사일 방어 공조로 가는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최순실 국정 개입을 덮기 위한 국면전환용 아니냐”는 더불어민주당 김진표 의원의 질의에는 “주무 부서인 국방부가 필요성을 느껴서 하는 것이며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일본과의 관계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경계하고 주의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현실적으로 협조할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야권은 GSOMIA 추진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는 “군사적으로 일본과 손잡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국방부는 국민을 또다시 분노하게 할 협정 추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우 원내대표는 “과거사는 명확히 정리되지 않았다. 36년간 일본군의 군홧발에 무고한 사람이 유린당하고 희생됐지만 무엇이 개선됐느냐”며 “협정 체결은 국민 정서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위안부 졸속 합의로 국민적 분노가 여전한데 정부가 왜 임기 후반에 이런 일을 추진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일본 아베 정부의 개헌과 동북아 진출을 공개적으로 지지한다는 말인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3년 전 공개된 미국 보고서에서 드러난 군의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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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발사되는 PAC-3 MSE 요격미사일. 록히드마틴 제공 |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국방부의 GSOMIA 체결 논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012년 추진 당시 이명박 정부도 똑같은 이유로 GSOMIA를 강행했다. 일본이 보유한 감청시설이나 신호정보수집기 등 정보자산을 통해 북한 동향을 더 면밀히 관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은 2000년대 이래 항상 존재해왔다. 위협이 고도화되고 있다지만 미국의 확장억제가 제공되고 있고 정보도 공유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지난 2013년 6월 미 의회조사국(CRS)이 발간한 보고서에 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탄도미사일방어:협력과 반대’라는 이 보고서는 한국, 일본, 호주 등 아시아의 동맹국들이 이지스구축함과 X-밴드 레이더, PAC-3 등 미사일 탐지와 요격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고 있다며 “상호 협력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고서는 “한국과 미국, 미국과 일본은 협정을 맺어 이같은 조치가 가능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제도적 장치-GSOMIA-가 없다”며 “2012년 GSOMIA 체결 불발로 3국 공동 미사일 방어 체계 구축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위협을 전면에 내세웠던 국방부의 설명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다. 보고서에서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미국 본토로 날아오는 적 미사일을 자위대가 요격할 수 있도록 일본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한 부분이다. 아베 정권의 ‘보통국가화’를 미국이 묵인하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3국 공동 미사일 방어 구축의 핵심은 상호운용성과 정보 공유다. 통일된 군사 규격을 갖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소속 유럽 회원국들과 달리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주도의 군사기구도, 군사규격도 없다. 미군의 미사일 방어망은 광대한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 일본 등 동맹국들이 자체적으로 구축한 미사일 방어망을 미국의 기준에 맞춰 상호 연결하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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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도미사일을 먼 거리에서 탐지하는 X밴드 레이더. 레이시온 제공 |
이 과정에서 핵심은 중국, 북한, 러시아 등 미국의 패권에 반발하는 국가와 인접한 한국, 일본의 협력이다. 때문에 미국측 인사들은 GSOMIA 체결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은 8월 2일 한국국방연구원(KIDA) 조찬포럼에서 “역사적으로 적이었던 국가, 깊은 반감이 생기는 관계에 있는 국가간 신뢰를 재형성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정보가 분산되어 있으면 상황을 명확히 인식하기 위한 공통상황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어렵다. 상황 발생 시 효과적 대응도 어려우므로 조기경보 분야의 정보공유가 가장 필요하다”며 GSOMIA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2013년 4월 마틴 뎀프시 당시 미 합참의장도 “한미일 3국간 협력적 미사일방어체제가 필요하다”며 “개별 미사일방어망보다 통합적인 미사일방어망이 낫다”고 밝힌 바 있다.
◆ GSOMIA 체결, 한미일 공동 MD 신호탄
우리나라는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구축을 명분삼아 한미일 3국 미사일방어 협력에 발을 들여놓고 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2009~2012년까지 미 국방부 미사일방어국(MDA)과 국방분석연구소(IDA)와 함께 미사일방어에 대한 공동연구를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에는 한국과 일본 군사당국자들이 미국에서 열린 ‘님블 타이탄(Nimble Titan) 16’ 워게임에서 북한의 잠수함탄도미사일(SLBM) 발사를 가정해 정보를 공유하고 위협을 평가하며 공격작전도 긴밀히 협의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님블 타이탄은 가상 적국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가정하고 토의식 연습과 워게임을 하는 다국적 탄도미사일 방어연습이다. 우리나라는 2011년부터 실무자 위주로 참가해왔다. 6월 28일에는 한미일 3국 이지스함이 하와이 인근 해역에서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탐지·추적하는 미사일 경보훈련을 실시했다. 이 훈련은 지난 21일 한미 안보협의회(SCM)에서 정례화가 결정됐다.
일련의 훈련과 연구 참여가 알려질때마다 한미일 3국 미사일방어 협력과 GSOMIA 논란이 일었지만 국방부는 “독자적인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에 참고한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공동 대응하는 것이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와 우리 군의 행보, 미군 관계자들의 발언 등을 종합하면 한미일 공동 미사일방어체계 구축에 우리나라가 서서히 참여하는 모양새다. 일본도 1987년 전술적 차원의 미사일방어에 대해 미국과 공동연구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SM-3 요격미사일 공동개발 등으로 협력 범위가 크게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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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4차 핵실험 직후인 지난 1월 8일 일본 방위대신과 전화통화를 하는 한민구 국방부 장관. 국방부 제공 |
한미일 3국 협력이 우리나라의 미사일 방어에 도움이 될까. 앞서 언급한 보고서는 “기술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북한과 너무 가까워 미사일이 저궤도로 수 분 내에 날아와 3국 미사일방어 공조에서 이득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중국, 러시아의 반발 등 위험요소는 많지만 이를 만회할 이득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과 미국은 적성국과 가장 가까운 곳의 미사일 탐지 자산이 확보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요격 태세를 강화할 수 있다. 미사일 방어 협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중국, 러시아로부터 떼어내는 외교적 효과는 덤이다.
미국의 압박, 일본의 재촉, 부정적인 국민 여론 사이에 끼어있던 정부는 ‘최순실 게이트’로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GSOMIA 논의 재개를 결정했다. 대통령 지지율이 10% 초반으로 추락하는 시점에서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식으로 전격 발표된 GSOMIA 논의 재개는 정부가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배고프다고 쥐약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국방부가 꺼낸 GSOMIA라는 카드가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는 보약이 될지, 한반도를 미국 주도 미사일방어망의 최전선으로 만들어 미중 패권다툼을 촉발하는 쥐약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