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01 00:52:50
기사수정 2016-11-01 00:52:50
19년 전과 빼닮은 사면초가 정치·경제 / ‘망국의 죄인’ 낙인 면하려면 정치인과 장관은 제 역할 하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한 평가를 받는다. 금융실명제, 민주화 운동, 하나회 혁파…. 한 일이 많다. 그런데도 왜 평가는 박할까. 나라를 망하게 한 탓이다.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나라 망친 대통령”.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나라가 망하고, 수많은 사람은 지금도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 어찌 공을 앞세우겠는가.
1997년 1월 23일.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보철강이 쓰러진 날이다. 아침에 들어선 재정경제원 기자실. 을씨년스러웠다. 이런 생각을 했다. “드디어 대마가 쓰러졌다.” 두 해 전부터 이어진 부도 도미노. 마침내 빚 5조7000억원의 대마가 부도났으니 정부도, 은행도 호떡집 불난 듯했다. 신경영을 선포한 삼성전자의 1993년 매출이 8조원 남짓한 때이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그것이 국가부도의 도화선일 줄이야. 경제는 그때도 나빴다. 수년째 이어진 경상수지 적자. 중국 위안화 절하에 수출은 발목 잡히고, 미국 금리인상에 주식·외환시장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더 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김현철 게이트’. 대통령 아들 김씨가 온갖 인사에 개입한 국정농단 사건이다. 거액의 뇌물도 오갔다. 그해 3월 비리를 담은 녹화테이프까지 공개된다. 대통령 아들의 국정농단 파문. 어찌 됐을까. 짱짱하던 대통령의 목소리는 힘을 잃었다. 국민 열 중 아홉이 손가락질을 하는 판에 무엇을 힘으로 삼겠는가.
고사목처럼 변한 식물대통령. 5년 단임제 때문인가. 아니다. 부패한 자들 때문이다. 지금 그 아들은 정치판을 기웃거린다. 웃긴 이야기 아닌가. 우리 정치가 얼마나 부패에 찌들어 있는지를 말해주는 거울이다.
바지저고리로 변한 대통령 리더십. 한보철강이 방아쇠를 당긴 위기는 빠르게 번졌다. 사방팔방으로 번진 금융 경색. 멀쩡하던 기업도 부도 벼랑에 내몰렸다. 예산·금융·경제정책 권한을 움켜쥔 재정경제원이 나섰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망국을 눈앞에 두고도 시위에 나선 한국은행 직원들. 왜 그랬을까. 제 밥그릇만 보는 사람들. 국제금융시장은 이런 평가를 했다. “한국은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 그 결과가 바로 1997년 외환위기다.
19년 만의 데자뷔. 악몽은 되살아나고 있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똑같다. 김씨가 최순실씨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국정농단의 정도는 더 악성이다. 김씨는 아버지를 등에 업고 못된 짓을 했지만 지금은 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을 의심받고 있다. 대통령 리더십? ‘최순실 게이트’에 여당조차 “거국중립내각” 목청을 높이고 있지 않는가. 대통령은 식물로 변했다. 경제? 1997년 이후 지금처럼 거센 풍파가 닥친 적도 없다.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지금처럼 악성은 아니었다. 0%대 경제성장, 무너진 수출, 실패한 노동개혁, 성장 전위대 격인 삼성전자와 현대차의 위기…. 청신호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불 끄기에 나서야 할 공직자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만든 정책이 최씨 손에 놀아났다는 말인가.” 이런 판에 무슨 사명감을 가지겠는가. 정치인은 또 당리당략을 앞세운다. 그것도 19년 전과 어찌 그리 똑같을까.
지난 19일 소집된 경제장관회의.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매주 열겠다”고 한 후 처음 연 회의다. 멤버 17명 중 참석한 장관은 3명뿐이다. 나머지 장관은 무슨 일로 그렇게 바빴을까. 경제장관에게 나라경제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도 있는가. 경제부총리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시답잖게 여겼든지, 마음이 콩밭에 가 있든지 둘 중 하나일 성싶다. 파탄 난 정부 리더십의 단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6일 열린 한국은행 간담회. 이주열 총재는 이런 말을 했다.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되 최선의 상황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라.” 섬뜩한 말이다. 외환위기 때 한은 핵심조직인 조사부를 이끌며 온몸으로 위기를 맞닥뜨렸을 그의 말 깊이는 뜬구름 잡는 말을 하는 유 부총리와는 크게 다르다. 어두운 나라 운명을 걱정하는 말이다.
정치도, 경제도 사면초가(四面楚歌)다. 1997년의 위기는 다시 밀려들고 있다. 이번에는 누가 나라 망친 죄인이 될까. “바로 저 사람이 역사의 죄인”이라는 말이 두렵지 않은가.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