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01 19:31:23
기사수정 2016-11-01 23:48:48
9·19 공동성명 복귀 타진… 한국, 미국과 공조·소통 필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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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북·미 비공개 접촉에 참가한 리언 시걸 미국 사회과학원(SSRC) 동북아안보협력 프로젝트 국장(왼쪽)과 한성렬 북한 외무성 부상(오른쪽)이 지난달 22일 호텔에서 각각 기자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있다. 쿠알라룸푸르=연합뉴스 |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60·최서원으로 개명)씨 국정농단 파문이 국내를 강타하는 가운데 국외에서는 북핵 문제와 관련한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한때 선제타격론이 풍미하던 미국 측에서 이번에는 북·미 대화 국면을 탐색하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파문을 일으킨 저서 ‘빙하는 움직인다’에서 한반도의 신냉전 상태를 빙하에 비유했다. 빙하는 눈이 오랫동안 쌓여 다져져 육지의 일부를 덮고 있는 거대한 얼음층이다. 북·미 간 탐색전 양상은 빙하는 아니더라도 빙하에서 떨어져 해면을 표류하는 빙산 정도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북·미 대화 탐색… “빙산 움직이나”
국제사회가 빙산의 움직임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지난달 21∼22일 말레이시아에서 진행된 북·미 비공식 접촉이다. 북한에서는 한성렬 외무성 부상 등 5명이, 미국에서는 로버트 갈루치 전 국무부 북핵 특사 등 4명이 참석했다. 이번 접촉에 참여한 조지프 디트라니 전 6자회담 차석대표는 미국의소리방송(VOA)에 “북한이 9·19 공동성명으로 돌아갈 의지가 있는지 알아보는 데 초점을 맞춘 탐색적 대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2005년 6자회담 당사국(남북·미·중·러·일)이 서명한 9·19 공동성명은 북한의 모든 핵무기·핵 계획 포기, 조속한 시일 내 핵확산금지조약(NPT)·국제원자력기구(IAEA) 복귀와 나머지 5자의 대북 에너지 지원 및 교역투자 분야 경제협력을 골자로 한다. 미국의 대북 재래식·핵 공격 의사 없음 확인, 북·미 및 북·일 관계 정상화 추진,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할 당사자 간 포럼 발족 내용도 포함한다. 이후 북·미 대립으로 사실상 휴지조각이 된 상태이지만 당시엔 북핵 해결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5트랙(반관반민) 내지는 2.0트랙(민간) 차원이었다지만 북·미가 북핵 문제 해결의 전범처럼 여겨졌던 9·19 공동성명 이행 여부를 탐색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북·미 접촉을 전후해 미국 정부 안팎에서는 대북 제재·압박 한계론과 북·미 대화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특히 현직인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장(DNI)은 지난달 25일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으며, 따라서 현실적으로 핵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이는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하는 미국 정부의 대원칙과 배치되는 것이다.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 폐기를 뜻하는 비핵화가 아니라 추가적인 핵 능력 고도화 방지와 핵기술의 제3국 이전 차단을 의미하는 핵 동결·비확산 수준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 접근할 수 있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화전양면·성동격서 전술의 미국
한·미 정부는 북·미 접촉에 대해 “미국 정부와 무관하다”, 클래퍼 국장 발언에는 “한반도 비핵화 목표에 변함이 없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미국 전·현직 관리의 행보와 언급에 대해 우리 정부 안팎의 속내는 대체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미국이 한반도 비핵화 정책을 포기할 리 없다는 의견이다. 제임스 김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현 정부의 임기가 두 달 정도 남아 있고, 미국 대선에서 당선이 유력시되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대북정책도 현 정부와 크게 다를 바 없다”며 “클린턴 후보는 당선 시 비핵화를 전제로 한 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점에서 오히려 더 강력한 제재를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차기 미국 정권이 대북정책을 재검토할 가능성이 커 북한 정권 교체에 초점을 맞춘 박근혜정부가 제재 일변도 정책을 고수하면 대화 국면에서 소외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새 행정부는 북한의 핵 능력이나 미사일 능력의 증강 속도를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묶어두려고 할 수 있고, 이런 입장에서 대북 협상에 나설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문제는 박근혜정부가 정책 전환 준비가 돼 있지 않아 미국에 더 강경한 대북정책을 요구할 수 있고, 이 경우 한·미 간에 엇박자가 나오고 박근혜정부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의 전형적인 화전양면 전술이나 성동격서 전술에 주목해야 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화전양면 전략이란 외교와 전쟁 수행의 힘을 모두 가진 미국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화나 압박 어느 하나에 구애되지 않고 모든 선택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all options are on the table)는 것이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는 성동격서도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흔히 볼 수 있다.
2003년 겉으로는 한반도 문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 동북아에 군사력을 동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실제로는 이라크 침공 준비를 위해 미군을 중동지역에 조용히 재배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남궁 영 한국외국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북한의 5차 핵실험, 장거리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무수단 등 연속적인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입장에서 북핵 문제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의미”라며 “이 경우 북핵 문제 해결 방법은 선제타격을 의미하는 예방적 공격이나, 대화 두 가지 방안밖에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청중 기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