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막히고 사라진 점자 블록… 길 잃은 시각장애인

4일 ‘점자의 날’… 갈 길 먼 시각장애인 보행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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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1번 출구. 시각장애 1급인 손모씨가 계단을 올라선 뒤 바삐 오가는 인파 사이에 멈춰섰다. 역 출입구까지 이어지던 점자 블록 행렬이 끊어져 혼란에 빠진 탓이다. 흰 지팡이로 부지런히 더듬은 끝에 겨우 횡단보도에 이르렀지만 한동안 불안에 떨어야 했다.

이곳은 2011년 대형 종합쇼핑몰 디큐브시티가 들어서면서 일대에 공원이 조성됐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광장을 지나 경인로에 이르기까지 100 넘는 구간의 점자블록이 사라진 것이다. 한때 장애인 단체와 협의를 통해 점자블록을 다시 설치하는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지만 지난해 디큐브시티의 관리업체가 바뀌면서 무산됐다.


점자블록이 설치되지 않은 서울 구로구 신도림역 인근 광장 모습.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광장 건너편 횡단보도로 가는 길이 끊어진 셈이다.
현행법상 사유지는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에 대한 의무가 없는 데다 예산 문제뿐 아니라 노란색 점자블록이 ‘너무 튀어서’ 주변 디자인과 배치된다는 이유 등으로 디큐브시티 측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인로 건너편 보도에는 점자블록이 설치돼 있지만 디큐브시티 쪽엔 사라진 것이다. 디큐브시티 측은 점자블록 설치 관련 계획이 없는지 문의하자, “답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수많은 시민이 이용하는 구역일지라도 사유지란 이유로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에 사각이 발생하는 경우를 도심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등이 공공영역에 대해서만 규정할 뿐 사유지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은 탓이다.

자연스레 행정기관의 단속과 계도에도 한계가 따른다. 서울 A자치구 관계자는 “장애인 민원이 접수돼 토지 소유주에게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요청을 해보지만 강제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다”며 “불법 석재 볼라드에 대한 단속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실제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인근 국민은행 건물 앞 보도에는 점자블록 위로 석재 볼라드가 떡하니 설치돼 있다. 암흑 속에서 점자블록을 따라 걷던 시각장애인 입장에서는 자칫 부상을 당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 시각장애인(1급)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역 인근 보도에서 점자블록을 따라 걷던 중 갑자기 만난 석재 볼라드를 피하고 있다.
이재문 기자
4일은 점자의 날이다. ‘시각장애인의 세종대왕’으로 불리는 송암 박두성 선생이 1926년 한글 점자를 만들어 반포한 것을 기념해 지정됐다. 점자의 날 90주년인 올해는 점자법이 제정(5월29일)된 해이기도 하다. 시각장애인의 점자사용 권리 신장 및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 이 법은 국가와 국민이 점자의 발전과 사용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의무 또한 공공에 국한돼 있고 세부 시행령이나 시행규칙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사유지나 공공부지에 관계없이 보도에서는 모든 보행자의 안전이 보장돼야 한다”며 “특히 보행 약자인 시각장애인이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사회의 관심과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글·사진=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