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03 21:51:11
기사수정 2017-02-03 15:52:20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모자를 벗자 팔부능선의 선선한 가을 기운이 머리를 감싸 돈다. 여자들끼리 따로 자리 잡은 곳에 끼어있던 아내가 뒤돌아보며 김밥을 건네준다. 군데군데 흩뿌려져 있는 색색의 단풍들은 가을 햇살에 서로 얼굴 드러내기 바쁘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빛바랜 상수리나무 잎사귀 사이로 단풍만큼이나 울긋불긋한 옷으로 차려입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올라오고 있다.
내려오는 길은 한층 다듬어져 있었다. 소나무와 예쁜 색깔의 갖가지 꽃들이 조화롭게 가꾸어져 있었다. 이야기 건네듯 길섶에 놓인 분재와 수석들이 눈길 설레게 하며 발길을 붙잡기도 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작은 산 하나 두고 내 맘대로 꾸미는 나만의 공간을 그려보기 시작했었다. 설핏하게나마 이곳에서 그 꿈의 조각 하나 주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담 숲 작은 계곡의 물은 흐르는 계절, 혼돈의 시절을 적시고 있다.
아마 고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마땅히 갈 곳 정하지도 않은 채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와 서울역에 훌쩍 내린 적이 있었다. 어둑해진 역 광장으로 나서자 사람들은 금세 총총 사라지고 매서운 추위를 몰고 오는 바람만 사정없었다. 아~ 이 서울에서 두 발 뻗고 따뜻하게 누울 수 있는 크기의 작은 공간만이라도 내 소유로 가질 수 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 같았다.
인간답게 살 최소한의 공간 환경으로 정하고 있는 최저주거기준에 미치지 못한 가구가 현재 100만 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매년 조금씩이나마 그 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러나 이들은 오르는 집값과 저금리 때문에 점점 월세로 밀려나 주거 안정성조차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비록 나만의 공간을 가질 수 있다 해도 그곳에서 우리 모두가 좀 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서로가 노력해나가야 할 것 같다. 철학자 헤겔은 인류의 모든 역사는 ‘자유의 신장사(伸長史)’라고 했다. 고대엔 오로지 왕 하나만이 자유로웠고 중세엔 소수의 귀족만이 자유를 누렸지만 역사의 진전에 따라 결국 만인이 자유로운 시대로 귀결한다는 것이다.
한동안 나는 출퇴근하는 직장에 다니질 않은 적이 있었다. 자연히 집에 머무른 시간이 많았다. 넓지 않는 아파트이지만 우리 부부는 각자의 공간을 정해두고 이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내 방에서 하루 종일 내가 무엇을 하든 아내는 간섭하지 않았다. 나 또한 괜히 부엌일을 거들려고 애쓰거나 애써 만들어준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일을 삼갔다. 편안했다. 방해받지 않는 자유로운 나만의 공간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행복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럼 그 공간이 어디일 때 행복할까? 우리는 광장이나 커피숍, 식당에서 대체로 가장자리 자리부터 채워나간다. 자기는 노출되지 않으면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장소가 마음을 끌기 때문이다. 영국의 지리학자 애플턴은 매력적인 장소는 조망(prospect)과 피신(refuge)의 원리로 선호된다고 설명했다. 사냥당하지 않고 사냥할 수 있는 위치가 좋다는 것이다. 어릴 때 틈만 나면 책상 밑이나 장롱 안으로 기어들어가 웅크린 채 빠꼼이 바깥 동정을 살피기를 즐겨 했다. 나이 들고 기술의 발달로 초연결사회가 되면서 모양새는 약간 달라졌다. 자신만의 공간에 몸 감추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외부와 어울리고 가상적 조망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혼자 사는 여성도 위험을 느끼지 않을 만큼 안전하고 자유로운 공간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고, 그 안에서 안락한 마음으로 트인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한껏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가 담기지 않는다면 쓸쓸해지고, 꿈이 사라지면 더욱 외로운 공간이 되리라.
서명교 대한건설정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