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07 22:11:03
기사수정 2016-11-07 22:11:03
“이러려고 공무원 했나 싶네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가 있은 직후 한 공무원과 점심 자리를 가졌다. 1만원짜리 점심특선 김치찌개를 먹으며 부정청탁금지법 때문에 ‘더치페이’를 하네 마네 하는 자리였다.
이날 점심 자리의 주제는 역시 ‘최순실 게이트’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함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탄식이 뒤섞인 자리였다.
자리가 끝나갈 즈음 그는 “대통령 말을 빌리자면 이러려고 공무원 됐나 싶은 생각이 든다”고 푸념했다. 박 대통령의 두 번째 사과 기자회견에 나온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든다”는 말은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숱한 패러디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려고 국민 했나 싶다’거나 ‘이러려고 개그맨 했나 싶다’는 식이다. 대통령의 자괴감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국민의 한 사람로서 느끼는 자괴감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공무원도 마찬가지인 듯싶다. 어쩌면 공무원 집단이 느끼는 자괴감은 더 클 수 있다. 지근거리에서 본 중앙부처 공무원들의 업무 강도는 여느 대기업 못지않다. 야근도 잦고, 상사에게 깨지는 것도 부지기수다. 자신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이 국민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어떠한지 알기에 허투루 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보고서가 아무런 자격도, 책임도 없는 이에게 건네져 ‘빨간 줄’로 난도질당한 셈이다. 관련 사업은 뒤바뀌었고, 예산은 마음대로 늘고 줄었다.
뿐만 아니다. 비선 실세에 찍힌 공무원은 하루아침에 옷을 벗기도 했다. 비단 문화체육관광부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나 이권사업 의혹을 겪고 있는 농림축산식품부와 산업통상자원부도 마찬가지다. ‘쫓겨나는 공무원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게 당연하다. 최순실이 앓고 있다는 공황장애를 공무원 집단이 걸릴 판이다.
공무원의 사기저하는 고스란히 행정공백으로 이어진다. 당장 경제 분야만 하더라도 해결해야 할 숙제가 수두룩하다. 청년실업, 산업 구조조정, 가계부채, 부동산 투기 등 당면한 문제를 풀어갈 의지가 현 공무원 집단에 있는지 의문이다.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책임감은커녕 ‘이걸 해서 뭐 하나’ 하는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수장을 새로 뽑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일선 공무원들이 공감하고 움직이지 않는 한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배를 이끌어 갈 선장도 중요하지만, 선원들의 사기가 바닥을 치고 있어서야 추진력을 얻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국가적 공황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기본은 공무원의 중심잡기에 있다. 국가는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하고,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은 관료이기 때문이다.
과거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요즘같이 ‘혼이 비정상인’ 시국에서는 영혼이 없는 편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잘 짜인 시스템을 중심으로 어려움에 처한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안용성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