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대통령의 자기모순

국기문란 언급 없이 사과뿐… 문건유출 때와 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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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로 민주공화국이 위기를 맞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 헌법이 물욕에 눈먼 일개 필녀(匹女)에 의해 유린당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사적으로 양도했다는 국기문란 파문에 휩싸였다. 도덕성과 권위가 추락한 박 대통령은 사실상 ‘식물상태’이고 국정도 마비됐다.

최순실 게이트에 성난 민심은 들끓고 있다. 지난 5일 광화문에 모인 20만명의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여전히 국민에게 무릎을 꿇을 의사가 없는 듯하다. 박 대통령의 행보에서는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국민과 야당의 거센 저항에 후퇴를 거듭하면서도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8일 국회 추천 총리를 전격 제안했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야당이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양보한 만큼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며 “두 야당은 각 당 대선주자들의 입장 때문에 총리 추천에 합의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야당이 국정공백에 따른 역풍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성해야 할 박 대통령이 정치적 노림수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에 힘을 싣는 언급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박 대통령의 인식은 국기문란과 비선실세에 대해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박 대통령은 국가기밀 유출, 비선실세의 부패와 인사 전횡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국기문란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2014년 정윤회 문건유출 파문 땐 달랐다. 박 대통령은 그해 12월1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이번 문건의 외부 유출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비선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같이 몰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도 했다. 최씨는 2014년 당시 국가기밀 문서를 보고받고 대통령 연설문 수정에 관여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어려울 때 도와줬다는 이유로 정작 최씨를 비선실세로 생각하지 않는 자기모순을 드러낸 셈이다.

박 대통령은 자신과 최씨의 연결 고리 역할을 했던 ‘문고리 3인방’에 대해서도 잘못된 판단을 내려 화를 자초했다. 같은 해 12월7일 여당 지도부 회동에서 “이들이 무슨 권력자냐, 그들은 일개 심부름꾼일 뿐”이라고 말했다. 현재 문고리 3인방은 최씨의 국정농단에 연루돼 검찰수사 선상에 올랐다. 이미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공무상 비밀누설로 구속됐다.

청와대는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특정 언론에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관련한 감찰 내용을 유출한 것에 대해서도 “국기를 흔드는 중대한 위법행위”라고 규정했다. 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2015년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체육계 비리에 대해 “체육계 인사에 전혀 관계도 없는 사람이 관여가 됐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냐. 정말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고 일갈했다.

남상훈 정치부 차장
박 대통령은 자신이 말한 공직자의 경계 덕목도 지키지 않았다. 2014년 11월25일 국무회의에서 “공직사회에서 정의의 반대말이 불의가 아니라 의리라고 들었다”며 “공직에 있다면 국가를 위해서 사사로움은 멀리할 줄 아는 자기관리 능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연설과 홍보 등의 분야에서 최씨의 조언을 구했다고 인정했다.

국가권력이 최씨의 국정농단을 견제하지 못한 탓에 국민은 무력감에 빠져 있다. 박 대통령은 검찰 수사에서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실체적 진실을 털어놓고 한 줌의 권력에 대한 미련도 버려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국민에 의해 모든 권력을 내려놓으며 비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다.

남상훈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