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14 01:03:56
기사수정 2016-11-14 01:03:56
베이징 택시기사도 한국 걱정… CCTV는 광화문집회 생중계 / “사드 철회 가능성 커졌다” 반겨 / 한국 이미지 실추, 빨리 수습해야
베이징에 거주하는 기자가 어느 날 택시를 타자마자 택시 기사가 “당신은 한국인입니까”라고 물어왔다. “그렇다”는 답을 하기가 무섭게 택시 기사가 바로 던진 질문은 “박근혜 대통령은 언제 물러날 것이라 생각하는가? 한국이 참 걱정스럽다”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는 베이징 거주 한국인들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평소 안면이 있는 중국 지인들이 무심코 던지는 도를 넘어선 한국 정치 이야기도 거북하기는 별반 다름없다. 유쾌하지 않게 들리는 중국인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 상황은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택시를 타거나 평소 자주 이용하는 단골가게에 갔을 때 한국 드라마나 한국 최신곡을 알고 있느냐고 묻던 중국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국민)이 언제부터 한국 정치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졌는지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가오리방즈’(高麗棒子·고려몽둥이)란 한국인이나 조선족 비하 표현도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한국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다. 빨리 수습해야 한다.
‘만리장성’ 안에 꼭꼭 숨어 신성함을 고이 간직한 듯한 중국 권부를 공개 비난할 수 없는 라오바이싱의 유난스러운 한국 걱정은 공산당의 나팔수인 관영 매체가 조장한 결과이기도 하다. 국영 중국중앙방송(CCTV)은 대목이라고 판단했는지 아예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한국의 치부를 부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지난 12일 광화문과 서울시청앞 광장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에 수십만의 인파가 몰린 장면은 CCTV가 서울과 베이징의 생중계로 보도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를 비롯해 제호만 달리한 수많은 중국 매체는 한국의 집회 상황을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전했다. 자국 내 집회 우려를 따져 공권력에 도전하는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 중국 매체의 파격적인 한국 집회 라이브 방송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 정치 권력지형 변화가 중국의 이익이라는 특수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계획 철회 가능성이 중국으로서는 초미의 관심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으로 한반도 정책에 전폭적인 변화와 수정 가능성이 대두됐기에 더욱 그렇다. 앞으로 불어날 인파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는 차기 대통령 선거때까지 간단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중국의 사드 철회 압박 움직임도 탄력이 붙을 것이다. 중국으로서는 반길 수밖에 없는 국제정세 변화다.
중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 정치체제까지 들먹이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체제를 자화자찬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모습이다. 트럼프 당선 전에는 미국의 선거제도를 비하하고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을 대서특필하며 서구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들춰내는 데 주력했다. 지금은 ‘트럼프 호재’에 희색이 만면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행정부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한 의회 비준을 추진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일본 등 12개국이 타결한 TPP협정은 오바마 행정부에서 의회 비준을 받지 못하고 TPP에 반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몫이 됐다. 민주·공화당 지도부가 TPP 비준 절차를 진행하지 않겠다고 백악관에 통보했고 오바마 행정부도 동력을 상실했으니 TPP는 곧 폐기될 운명에 놓였다.
TPP는 중국 입장에서 단순한 자유무역협정을 넘어 미국의 아·태지역 세력 확장의 도구로 인식됐다. TPP에 맞선 중국 주도의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RCEP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 등 16개국이 역내 무역 자유화를 추구한다. 트럼프 당선으로 아·태지역에서 중국 입지는 더 탄탄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세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위기에 빠진 ‘한국호’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신동주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