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정농단 의혹 쏠리는 ‘왕실장’은 여전히 모르쇠인가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씨 국정농단의 공범이라는 검찰 수사결과가 나왔다. 박 대통령은 재임 중 비리가 드러난 첫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역사에 올리게 됐다. 철저하게 실패한 정권이다. 현 정권을 파국으로 이끈 책임은 박 대통령에게만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대통령을 보좌한 수많은 공직자 또한 역사 앞에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 중심에 ‘왕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다.

김 전 실장은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줄곧 “최씨를 알지도 못한다”며 책임을 피해왔다. 하지만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은 검찰에서 김 전 실장 소개로 최씨를 알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함께 박 대통령 핵심 자문그룹이었던 ‘7인회’의 한 인사조차 “우리도 최씨를 알고는 있는데, 그가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지적할 정도라고 한다. 최씨가 자주 이용한 차움병원에서 그가 지난해 3월부터 6개월간 줄기세포 치료를 받은 점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기 어렵다.

그는 2013년 8월 취임 첫 인사에서 스스로 말한 대로 철저히 “윗분의 뜻을 받들어서” 일하는 데에만 열중했다. 팔순을 눈앞에 둔 원로의 지혜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TV조선이 입수해 얼마 전 보도한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이 그의 구시대적 행태를 여실히 증언해 주고 있다. 2014년 6월부터 7개월간 김 전 실장의 지시사항 등을 기록한 비망록에는 ‘언론사 옥죄기’, ‘법원 길들이기’, ‘시민단체를 통한 야당 인사 고발’ 등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을 법한 사항들이 적혀 있다.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미연에 방지할 기회가 왔을 때에는 진실을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김영한 비망록’에는 그가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을 특종보도한 세계일보를 압수수색과 세무조사 등의 방법으로 옥죄려 한 정황이 나온다. 검찰권과 조세징수권을 들먹였다면 명백한 직권남용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을 농단한 허물에 대해서도 매서운 추궁이 있어야 한다. 검찰 특별수사본부가 조만간 김 전 실장을 소환조사한다니 진상 규명과 처벌이 이뤄져야 한다. 그에 앞서 김 전 실장 스스로가 모든 진실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것만이 역사에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갚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