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22 01:09:26
기사수정 2016-11-22 01:09:25
최순실 국정 농단이 일깨운 소중한 민주주의 지키려면 / 차기 대선주자들부터 작은 꿈 버리고 큰 꿈 꿔야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박근혜 대통령이 기소된 최순실씨 등과 공범관계에 있다는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일방적 주장”이라고 걷어찬 것은 결사항전을 선언한 것이다.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하다”는 말을 믿고 촛불 민심을 훨훨 타오르게 하고, 빼도 박도 못하는 수사 결과가 나오면 좀 달라지겠거니 했는데 헛물만 켰다. “5000만 국민이 달려들어 하야하라고 해도 절대로 내려오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던 김종필 전 총리는 박 대통령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청와대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들마다 “벽에다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까닭도 이제야 알겠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국정 농단의 주범이고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은 대통령의 지시를 따른 행동대장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이 한 일이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고, 정부 차원에서 공익재단 설립 지원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하고 최순실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했을 뿐인데, 최순실 안종범 정호성이 제멋대로 이권을 챙기고 대기업 기부를 강제하고 청와대 문건을 유출했다고 주장한다. 대국민담화에서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여러 위법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너무나 안타깝다”고 한 유체이탈 화법의 반복이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국민에게 상처를 주고, 개인적 인연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정치적·도덕적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 대통령이 국정의 무거운 짐을 그만 내려 놓더라도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역량이 국민에겐 있다.
그러나 청와대가 삼각산을 병풍 삼아 진지전 태세에 들어감에 따라 장기전이 불가피해졌다. ‘나를 밟고 가라’고 탄핵소추 카드를 들고 나온 이상 전선은 간명해졌다. 수읽기 싸움을 펼치며 장고를 거듭했던 야당에 선택의 여지는 없어졌다. 이제부터는 외길 수순이다. 먼 길을 돌아가는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탄핵을 주저할 이유는 없다. 탄핵의결 정족수 국회의원 200명, 헌법재판소 재판관 6명 이상 찬성을 걱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낮추어 보는 것이다. 설령 탄핵이 실패하더라도 헌법에 따라 국민의 이름으로 대통령의 위법행위를 단죄하려 했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를 살찌우는 일이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이 탄핵 당론을 채택했다. 탄핵 과정에서 겪어야 할 국정 공백과 혼란은 안타깝지만 국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다.
탄핵의 길로 들어서자마자 국회추천 총리 인선이라는 난관에 봉착했다. 대통령 하야 퇴진을 고수하다 타이밍을 놓친 감도 없지 않다. 국회를 방문해 “여야 합의로 총리를 추천해달라”고 했던 박 대통령이 “조건이 달라졌다”며 대통령 퇴진을 전제한 국회추천 총리 불가로 말을 바꿨다. ‘여야 합의 총리’ 기조가 유지된다 해도 새누리당 친박 지도부가 딴청을 부리면 그나마 ‘여야 합의’도 쉽지 않다. 박 대통령이 지명한 김병준 총리 내정자를 야당이 내친다면 황교안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를 맞을 수도 있다. 이미 최선은 물 건너갔다. 차선마저 어렵다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 팔과 다리를 내주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것보다 지키는 것이 더 힘든 일임을 새삼 절감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중도에 물러나든 임기를 끝까지 마치든 그때까지의 과정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뜨거운 축제가 돼야 한다. 검찰 수사를 본 뒤 대통령을 향해 더 많은 비난을 쏟아내고, 광장에 더 밝은 촛불을 밝히고, 더 큰 구호를 외칠 수 있게 됐다 해도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분노를 뿜어내는 것과 분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별개 문제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냉철한 판단과 실천적 대안은 정치의 몫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정치 말고 큰 정치를 보여줄 때다. 최순실 국정 농단이 일깨운 소중한 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고 가꾸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차기 대선주자들부터 눈앞의 작은 꿈을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