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1-22 22:02:28
기사수정 2016-11-22 22:02:28
권력 업고 매관매직 등 국정 농단한 궁녀
광해군 배신… 반란군에 이용당하고 숨져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됐다. 조선 역사상 두 번의 반정이 일어났고, 반정으로 쫓겨난 두 명의 왕 연산군과 광해군은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니만큼 억울한 것이 없지만, 광해군의 폐위에 대해서는 현재에도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광해군은 초반의 개혁정치와 실리외교라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말년에는 지나치게 독선적으로 정국을 운영해 반대파 결집의 빌미를 제공했다. 광해군 후반 정국에 등장해 광해군을 혼군(昏君)으로 이끈 여인이 있었다. 바로 상궁 김개시(金介屎)로, 김개똥으로 불리기도 했고 ‘계축일기’에는 ‘가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장녹수나 장희빈처럼 후궁의 지위에서 왕의 판단을 흐리게 한 여인들과 달리 김개시는 상궁으로서 국정을 좌지우지한 인물이었다.
광해군과 김개시의 인연은 선조 때부터 시작된다. 실록은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가 많았다. 춘궁(春宮·광해군)의 옛 시녀로서 왕비를 통해 나아가 잠자리를 모실 수 있었는데, 인하여 비방(秘方)으로 갑자기 사랑을 얻었다”고 해 김 상궁이 용모는 뛰어나지 않았지만 비밀스러운 방책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사로잡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어서 김개시는 광해군의 최고 심복 이이첨과 교분을 맺게 되면서 권세가(權勢家)를 자유롭게 출입했다. 광해군은 1613년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처형한 이후 반대세력에 대해 철저한 정치적 탄압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이이첨 중심의 대북(大北)세력만이 광해군을 비호하는 상황이었다. ‘계축일기’에는 ‘가희’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죽이려고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녀가 늘 광해군의 의중에 맞추려 했음을 볼 수 있다. 김개시와 이이첨에 대해서는 비난 여론이 많았지만, 광해군은 ‘역적 토벌’의 전위부대인 이들을 깊이 신임했다.
광해군의 후원을 입은 김개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위로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로부터 아래로 권관(權管)·찰방(察訪)에 이르기까지 천 냥, 백 냥 하는 식으로 모두 정해진 액수가 있어 값에 따라 선발하고 낙점도 또한 이런 액수로 정했다. 김 상궁이 붓을 잡고 마음대로 하니 왕도 어떻게 하지 못했다”는 ‘속잡록’의 기록이나 “김 상궁은 선조 때의 궁인으로 광해군이 총애하여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줌으로써 권세를 내외에 떨쳤다. 또 이이첨의 여러 아들 및 박홍도의 무리와 결탁하여 그 집에 거리낌 없이 무상으로 출입하였다”는 ‘광해군일기’의 기록을 통해 인사권까지 장악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김개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광해군 정권 내내 국정을 농단한 그였으나 정작 마지막에는 광해군의 편이 되지 못했다. 반정군 측에 포섭돼 김자점 등에게서 뇌물을 받은 김개시는 여러 차례 반정을 알리는 상소를 받은 광해군을 안심시켰다. 반정의 성공에 일익을 담당했지만, 1623년 3월 인조반정 직후 김개시는 민가에 숨어 있다가 처형됐다. 광해군대 국정을 농단하고 최후에는 광해군을 배신한 김개시. 그는 새로운 정권에서도 제거대상 1호로 떠올랐던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