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2-19 19:45:47
기사수정 2016-12-19 21:46:42
가뜩이나 피곤한데 '최순실게이트'까지 / 의욕·성취감· 공감 능력 떨어지다 심하면 우울증·공황장애 올 수도 / 비체계적 지시·과도한 업무량 탓 /“잠시라도 마음 여유 찾는게 도움”
대기업 정보기술(IT) 업종에 종사하는 4년차 직장인 박모(29)씨는 요즘 들어 일할 의욕을 잃은 채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있다. 노력한 만큼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강요하는 상사도 그를 지치게 한다. 박씨는 “열심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며 “다 때려치우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외국계 중견기업에 다니는 이모(29)씨도 비슷한 처지다. 올해로 직장생활 4년차인 이씨는 “뛰는 놈 위에 (최순실과 그의 딸처럼)나는 놈이 있으니 아등바등 노력해도 안 되는 나라”라며 “최근 허무한 마음이 더 커진 것 같다”고 씁쓰레했다.
쉼 없이 달려온 한해를 마감할 즈음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터져 삶의 여유나 활력을 잃고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소진 증후군)에 시달리는 직장인이 많다. 전문가들은 노동시간 단축 등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번아웃 증후군은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스트레스 의학 전문가인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윤대현 교수(정신건강의학)는 19일 “소진 증후군은 일과 사람, 여가로 구성되는 라이프 스타일의 균형이 깨진 데 따른 것으로 의학적 진단명은 아니다”며 “증후군에 빠지면 의욕과 성취감, 공감 능력이 저하된다”고 설명했다.
증상이 심해지면 건망증과 불면증, 불안증 등이 나타나고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
직장인 대부분은 이런 극심한 피로 상태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3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88.6%가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 이유(복수 응답)로는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 진행(65.3%)이 가장 많았고 △과도한 업무량(58.9%) △커뮤니케이션 어려움(32.9%) △갑이 다수 존재(31.8%) △성과를 인정 못 받음(31.5%) 등의 순이었다.
한 백화점의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유모(28·여)씨는 “‘과장님이 물어보더라’는 한마디에 뭔가를 뚝딱 만들어내야 할 때면 패배감이 든다”며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 지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번아웃 증후군이 직장생활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업무 집중력 저하(74.4%·복수 응답)가 1위를 차지했으며 △퇴사 욕구 상승(72.9%) △삶에 대한 회의와 목표 상실(55.5%) △회사에 대한 반발(50.3%)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한 제조업체 직원인 윤모(36)씨는 “올해가 가면 나이나 한 살 더 먹을 뿐 삶에 무슨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전문가들은 개인적인 노력과 함께 회사와 국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일에 지쳐 병원을 찾는 환자들에게 스트레스 관리법을 물어보면 대부분 없다고 한다”며 “매일 10분 정도 사색하거나 일주일에 한 번 친한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등 잠시라도 외부와 연결을 끊고 마음의 자유를 찾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양대병원 김대호 교수(정신건강의학)는 “한국 사회의 소진 증후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긴 노동시간과 연관이 있다”며 “직장생활 스트레스를 줄이는 가장 좋은 대책은 초과근무와 회식 등 업무 관련 시간 자체를 줄이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