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2-20 01:06:16
기사수정 2016-12-20 03:00:08
친박당에 남아 모멸감 참다 보면 / 부끄러움 익숙해지고 의원직도 사리사욕 채우는 벼슬 될 것 / ‘국민’ 입에 담지 말아야
새누리당의 비박은 친박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비박은 친박을 한사코 피하려고만 했지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말이 있다. 친박은 무서운 데다 더럽기까지 한 동네 조폭 같은 존재다. 똘똘 뭉쳐 막무가내로 망나니짓을 하고 다니는 사고뭉치들을 상대하려면 위험부담이 뒤따른다.
무례한 자들을 몰아내려면 정의의 사자의 힘을 빌리거나 법에 호소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정의의 사자는 없고, 그들의 보스처럼 법으로 다스릴 만한 혐의가 아직은 없다. 결국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친박의 정우택 의원은 원내대표 당선 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비박이 진즉 가슴에 담아 뒀어야 할 말이다.
싸움의 형세는 친박에게 기울었다. 새누리당은 본래 박근혜당도 친박당도 아니다. 국민세금으로 운영되는 공당이다. 당을 나가야 할 쪽은 당을 친박의 놀이터로 만든 사람들이다. 그런 자들이 비박의 등을 떠밀고 있다. 비박이 기대했던 ‘유승민 비대위원장’ 카드도 거부했다. 나갈 테면 나가라는 것이다. 비박이 떠나주면 친박에겐 앓던 이가 빠지는 것이다. 비박이 알아서 나가주면 지체없이 ‘배신자’ 낙인을 찍어놓고 희희낙락 ‘의리’를 외치며 사이비 보수, 웰빙당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다.
친박은 개전의 정이 없다. 반성하는 기색도, 사과 한마디도 없다. 오히려 더 거칠게 기세등등하다. 자숙하고 근신해도 모자랄 판에 박근혜 대통령 징계를 막으려고 당 윤리위에 친박계를 내리꽂고, 당 주도권을 다시 장악했다. 원내대표를 거머쥔 여세를 몰아 비상대책위까지 쥐락펴락할 태세다. 비상대책위원장은 비주류에 양보하겠다는 여유까지 부리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탄핵소추 답변서에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한 그들의 여왕과 정확히 일심동체다.
친박당으로는 대선후보 하나 제대로 낼 수 없는 불임정당을 면치 못한다. 지금의 새누리당 갖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는 이유가 수십·수백가지는 될 것이다. 친박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게 당이냐”는 소리를 들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믿고 찍어주는 지지자들이 있으니 아쉬울 게 없다.
이번 싸움의 승패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싸움은 절실한 쪽이 이기기 마련이다. 잃을 게 많은 친박은 사생결단, 온 몸을 던질 각오가 돼 있지만 비박에겐 그럴 만한 절박함이 없다. 비박은 사실 친박과의 대결에서 별로 한 게 없다. 비상시국회의를 만들어 친박 8적의 정계은퇴를 요구했고 대통령 탄핵안 가결에 힘을 보태기는 했다. 그러나 스스로 깨우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촛불민심에 놀라 탄핵대열에 뛰어들었을 뿐이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친박의 죄상을 낱낱이 파헤쳐 책임을 추궁하고, 최순실의 남자들을 찍어내는 데 앞장서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원내대표 경선에서 고배를 마시고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더니 이제는 비상대책위원장 자리에 곁눈질이다. 그마저도 갈등유발자는 안 된다는 친박의 대못질에 비박 대표 유승민 의원이 찔끔한다. 지난 총선에서 이한구 공천위원장이 공천 난동을 부릴 때 찍어낼 대상으로 거론한 ‘양반집 도련님’이 영락없는 비박이다.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월급쟁이 비슷하게 하다가 4년 내내 별로 존재감이 없던 그런 사람들 말이다.
비박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보따리를 쌀지 말지 결정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기꺼이 풍찬노숙의 길을 선택하는 탈당파가 있고 당에 남는 잔류파가 있을 것이다. 일찌감치 당을 떠난 김용태 의원은 “몇 사람 되지도 않는 사람들에 의해 다수의 국회의원이 꼼짝 못하고, 당이 질식하는 상황을 모멸감 속에서 견뎌야 했다”고 했다. 친박당에 남으려면 그런 모멸감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친박과 함께 진흙탕에 뒹굴다 보면 부끄러움도 어느새 익숙해질 것이다. 국회의원직은 눈앞의 이익을 채우기 위한 한낱 벼슬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국민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된다.
김기홍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