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규칼럼] 개헌이냐 개혁이냐

탄핵심판 이후를 준비할 때
시대정신 찾는 게 우선 과제
국가 차원 논의의 장 마련
국민적 합의부터 도출해야
헌법재판소가 내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첫 준비절차기일을 연다. 엊그제 공개된 박 대통령 답변서를 보면, 미국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저서 ‘공화국의 위기’에서 “거짓말쟁이가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믿게 만들고, 결국 이 일은 거짓말쟁이가 자기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끝날 가능성이 크다”고 한 말이 떠오른다. “비밀과 고의적 거짓이 늘 중요한 역할을 해온 정치 영역에서 자기기만은 가장 큰 위험이다.” 자기기만이 낳은 궤변 일색의 답변서는 탄핵심판이 빨리 끝날 것임을 예고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탄핵심판 이후를 준비할 때다.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민심은 대통령 탄핵을 넘어 우리 사회에 누적된 모순과 부조리를 없애고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얘기다. 어떻게 바꾸느냐가 문제다. 


박완규 논설위원
정치권을 중심으로 개헌론이 확산되고 있다. 국정농단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운영의 틀인 헌법을 바꾸자는 것이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가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지적한 대로 “정치권력의 행사는 헌법에 의거할 때에만 가장 적절한 것이다.” 개헌은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 지난주 여야가 국회 개헌특위 설치에 합의함에 따라 새해 벽두부터 개헌 논의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1987년 6월민주항쟁으로 민주화 개헌을 이룬 전례가 있다. 대통령 직선제에 초점을 맞췄기에 5개월 만에 개헌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촛불 민심에 무임승차한 정치권에 대한 불신 탓에 국회 차원의 개헌 논의에 회의적인 반응이 많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앞날을 고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앞가림에 급급한 실정이다. 대선을 앞두고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4년 중임 대통령제와 이원집정부제, 의원내각제 등으로 엇갈려 서로 치고받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그 와중에 개혁은 뒷전으로 밀려날지도 모른다. 이미 경험한 일이다. 1987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으나 결과는 또 다른 정치군인 노태우의 집권이었다. 1960년 4월혁명으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이뤄냈지만, 정치권이 국민의 변화 욕구를 읽어내지 못해 군의 정치 개입 빌미를 제공했다.

개헌이 아니라 개혁이 우선 과제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작금의 사태는 헌법 탓이 아니라 헌법을 지키지 않아 벌어진 만큼, 일단 현행 헌법을 유지하되 선거법 등 관련 법 개정을 통해 문제 되는 부분을 먼저 고치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힘 있는 자와 힘없는 자가 확연히 나뉘는 사회에서 벗어나 공생, 분권, 연대 등 민주주의에 걸맞은 철학과 가치를 일상 속으로 확산시키는 기회로 삼자는 주장이다.

개헌과 개혁은 맞물려 있는 과제지만 한꺼번에 하기가 버거운 게 사실이다. 개헌을 하더라도 당장 하느냐, 차기 정부에 넘기느냐로 의견이 갈린다. 대선주자들이 개헌을 공약으로 내걸고 새 정부에서 바로 개헌을 추진하게 하자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어떤 경우든 섣부른 개헌 논의에 휘말려 개혁의 동력을 잃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이 새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 게 바람직하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민주주의의 민주화’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제도 개혁 논의는 그간의 한계를 넘어, 상상력과 아울러 넓은 이성적·공론적 논의가 가능한 방향으로 확대·발전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다양한 계층과 집단, 지식인, 전문가, 정치인,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논의의 장을 만들되 정치권의 이해득실 계산은 배제해야 한다. 여기서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야 한다. 이런 절차 없이 개헌이나 개혁을 백가쟁명식으로 얘기하면 또 다시 방향을 잃고 표류할 것이다. 나라의 틀을 바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번에는 놓쳐선 안 된다. 시대정신을 찾아내는 데서 일을 시작해야 한다. 전 세계 시민들이 한국 촛불집회의 성과가 무엇인지를 주시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박완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