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2-26 20:51:51
기사수정 2016-12-26 20:51:51
[조용호의 나마스테!] 한국 대표 지성 김병익 문학평론가
“가장으로서 굶기지는 않았지만 호의호식을 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걸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서로 등을 기대고 지나온 세월입니다. 집사람이 남의 사정을 배려하는 이해력이 좋아서 현실적으로 다투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식 넷을 2년 터울로 낳아 결혼시켜 내보낼 때까지 하던 일을 그만두고 근 30년 동안 시간과 정열을 가족에게 다 바친 고마운 사람입니다.”
원로문학평론가이자 ‘문학과지성사’를 만들고 이끌어온 김병익(78)은 결혼 50주년 기념으로 아내 정지영(76)씨에게 책을 헌정했다. 일간지에 연재한 칼럼을 ‘시선의 저편’(문학과지성사·사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발행일을 결혼기념일인 지난 11월26일에 맞추었다. 그날은 출판사도 노는 토요일이었지만 그가 부탁했다. 그는 책머리에 “지영에게/ 더불어 온 쉰 해/ 글반지를 끼우며”라고 썼다. 책은 그가 아내에게 표현하는 고마움과 사랑의 ‘글반지’인 셈이다.
|
결혼 50주년을 맞아 아내에게 헌정하는 칼럼집을 펴낸 문학평론가 김병익. 그는 “어느 시대나 그 세대에 걸맞은 형식이 있다”면서 “리얼리즘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돌멩이가 촛불로 바뀐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이 시대의 표현법”이라고 말했다. 이제원 기자 |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정지영을 김병익은 서울대 캠퍼스에서 다시 만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데이트 신청을 했지만 “까였다”며 웃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김병익은 동아일보 신참기자로 살고 있었고 정지영은 한국은행에 다녔다. 기자들이 노는 ‘신문의 날’에 옛 인연들을 정리하려고 정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응해줬고 대화를 나누다 ‘어린 왕자’ 불어판을 빌려줘 다시 만날 불씨를 살렸다. 1년 후 그들은 결혼했고 50년 동안 서로 ‘등을 맞대고’ 기대어 한 길을 걸어왔다. 일견 평범하지만 이만큼 평온하게 한 생을 걸어오기도 결코 쉽지 않다.
“살아만 있다면 누구나 이 나이까지 오겠지만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나이에 이르고 보니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자주 생각하게 돼요. 제 경우는 순탄했다고 할까, 다행스럽다고 할까, 한 번도 가난한 적도 부자인 적도 없었습니다. 극단을 오가지 않고 정말 작은 진폭 속에서 숱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겠지만 김병익에게 사람들과의 인연은 갈림길마다 새로운 행로를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성장기에 여느 소년들처럼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문학이란 천재들의 몫이라는 생각을 일찌감치 하면서 사회과학 분야 대학에 진학했다. 정작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해서 문리대 수석으로 소문난 황동규 시인과 만나 시가 무엇인지 교류하면서 전공과는 멀어졌고, 졸업 후 동아일보에 입사해 문학 출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김현을 비롯한 문인들과 더욱 가까워졌다. 엄혹한 유신 독재가 시작되면서 기자협회 회장을 하다 ‘자유언론선언’으로 해직된 후로는 김현의 ‘꼬드김’으로 68문학 동인에 참여했고 ‘문학과지성사’를 대표하는 출판인으로 삶의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6·25전쟁과 분단을 통과해서 4·19, 유신, 광주항쟁, 6·10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생생하게 통과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오늘에 이른 그이가 바라보는 작금의 촛불 탄핵 시국은 어떠할까.
“우리나라, 우리 민족에 대한 경외랄까 신기한 박력이랄까 그런 걸 느끼게 돼요. 2차대전 후 해방된 나라로서 유일하게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국가가 된 저력을 실감하거든요. 제가 겪어온 한국 현대사가 전쟁 분단 유신 같은 정치사적으로는 늘 험한 일만 당해왔는데 결과적으로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지 않아요? 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다이내믹 코리아’가 맞아요. 우리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지만 지금까지 역사로 보아서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봅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없는 6·25라는 ‘그라운드제로’가 생존 욕구를 자극해 조용한 나라의 무기력한 국민에서 다이내믹한 한국으로 바뀌지 않았나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가 대학 4학년 때 4·19를 맞았는데 처음에는 시니컬하게 사태를 인식했다고 한다. 등굣길에 만난 고교생들이 시위 후 히히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진정성에 대해 회의했는데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들은 모두 하찮게 보이는 실마리에서 출발한 것 같다고 했다. 한 주검의 발견으로 촉발된 4·19나 고문당하다 죽은 학생으로 도화선에 불이 붙은 6·10항쟁이나, 시작은 작은 것이었지만 그때까지 축적된 모순과 불만이 폭발된 시대적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작금의 촛불 시위 국면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4·19는 봉건 농경제사회에서 탈피하는 총과 돌멩이의 싸움이었고, 6·10항쟁은 산업화된 사회의 노동자들과 여유를 갖게 된 중산층이 협력한 최루탄과 화염병의 투쟁이었고, 지금은 차벽과 촛불이 만나는 문화적인 항의 국면인 거지요. 4·19는 장기독재를 종식시켰고 6·10항쟁이 군부세력을 견제해서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지키고 이룩해냈다면, 지금 촛불시위는 그 민주주의를 일상화시키는 의미입니다.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민주주의가 이제 필요한 거지요. 단 한 사람의 연행자와 부상자도 없는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운 시위가 있었나요? 이건 기적에 가까운 겁니다.”
김병익은 대한민국 사회의 수준이 여기까지 이른 데는 출판의 힘이 컸다고 믿는 쪽이다. 그에게는 문학평론가, 출판인, 서평가, 번역가, 기자 등 다양한 직함이 따라다녔다. 그중에서도 가장 방점을 찍고 싶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 물었더니 ‘편집자’라고 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그가 해직기자가 된 후 밀어붙여 꾸려나온 ‘문학과지성사’에서 편집한 책만 1000종 남짓이다. 그중에서도 엄혹한 시절 펴낸 정문길의 ‘소외론 연구’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가 유독 기억에 오래 남는다. 마르크스라는 말만 들어가도 경기를 일으키던 검열 당국을 통과하기 위해 ‘마르크스 소외론’을 ‘1840년대 소외론’으로, ‘마르크스의 위대한 저작’을 ‘마르크스의 문제적 저작’으로 원문을 윤문하는 ‘얌체짓’을 해서 무사히 출판했던 추억을 그는 떠올렸다.
“원고가 좋으면 아무리 어렵고 전문적인 책이라도 최소한은 나간다는 신념을 갖게 됐지요. 이런 생각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요즘은 제가 사서 보는 입장인데 정말 놀랍게도 별의별 책이 다 나와요. 한국인의 지적인 열망은 이제는 일본 이상으로 선진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출판이 불황이라는 말은 1960년대부터 지속적으로 똑같이 반복돼왔습니다. 60년대에 참고서와 만화를 빼면 고작 1000종 안팎의 단행본이 나왔는데 지금은 수만 종이 나오죠? 해외 인구까지 합쳐도 6000만이 넘지 않는 나라에서 책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건 정말 존경의 위의를 표해야 합니다.”
화요일마다 오후에 만나 회포를 푸는 멤버들이 인터뷰가 진행되던 문학과지성사 6층 회의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김형영 시인에 이어 김주연 평론가가 들어왔다. 이들 외에도 오생근 황동규 정현종 김광규 서우석 홍정선 주일우가 곧 들이닥칠 터였다. 서둘러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작은 진폭 속에서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잔잔하게 이곳까지 잘 왔다는 그이에게도 회한은 없는지.
“절망할 것도 희망하는 것도 없는 나이에, 산다는 것,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허망한 것 아닌가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