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2-29 01:31:06
기사수정 2016-12-29 01:31:05
마오쩌둥의 맏아들 마오안잉, 후계자 학습 차 6·25전쟁 참전 / 김일성이 준 달걀요리 중 폭사 / 작은 잘못·실수가 큰 화 불러
마오안잉(毛岸英)은 마오쩌둥의 장남이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의 일원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지 한 달도 안 돼 사망했다. 28세로 결혼 1년차 신혼이었다. 그의 유해는 평북 회창군 인민지원군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북·중혈맹의 상징이자 맏아들을 전장에 보낸 마오의 모범 애국 사례로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다.
안잉의 사망은 중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사실 마오는 안잉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관리하던 차였다. 안잉은 10대 때 소련의 엘리트 군사학교인 레닌군정대학과 프룬제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전차소대장으로 참전했다. 둘째아들이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처지여서 마오는 첫째에 각별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마오는 국가원수답게 “내 아들이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하고 흔쾌히 전장에 보냈지만, 안잉이 안전을 확보하며 군사지식을 두루 접할 수 있게 지원군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의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다. 애초부터 3∼6개월 정도만 짧게 참전시킬 요량이었다.
안잉의 참전은 극비였다. 하지만 떠벌리기 좋아하는 안잉은 마오의 아들임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스탈린한테 선물로 받았다는 권총을 자랑하고 다녔다. 중국군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김일성의 귀에까지 들어간 건 물론이다. 안잉에겐 늦잠을 자는 버릇이 있었다. 선임이 귀국하면서 “시간 맞춰 기상하고, 시간 맞춰 식사하고, 시간 맞춰 방공하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였다. ‘날이 밝은 후엔 절대 연기를 내지 말며, 흩어져서 공습에 대비한다’는 공습 방비 규정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11월 25일 그날도 해가 중천에 뜬 오전 10시쯤 일어났다. 배가 출출한데 마침 달걀 꾸러미가 눈에 띄었다. 전날 김일성이 전선사령부 부사령관 박일우를 통해 특별히 보낸 달걀이었다. 전장에서 보기 힘든 귀한 식자재였다. 전우들이 “공습경보가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며 연기 나는 요리를 말리자 “겁낼 것 없다. 내가 보기엔 비행기는 한동안 오지 않을 것이다. 오더라도 어디 꼭 이곳을 명중시킬까?”라면서 달걀 요리를 시작했다.
안잉은 밥을 먹기도 전에 사망했다. 오전 11시쯤 그가 피운 연기를 감지한 미군이 B-26 폭격기로 네이팜탄을 지원군사령부에 투하한 것이다. 살 수 있는 기회는 있었다. 비행기 소리를 들은 초병이 “실내는 위험하니 밖으로 뛰어나오라”고 소리쳤지만 그 말 역시 무시했다고 한다. 결국 식탁 밑에서 달걀볶음밥과 함께 폭사했다. 방공 규율을 사사롭게 여기다 사령부가 박살났고, 자신도 목숨을 잃은 것이다. 늦잠의 보복일까 달걀의 저주일까.
안잉의 사망으로 마오의 후계구도는 크게 일그러졌다. 류사오치(劉少奇)에게 국가주석 자리를 물려줬지만 마오의 기대와는 달리 제 갈길을 갔다. 실망한 마오는 홍위병을 동원해 류사오치를 실각시켰다. 중국 역사상 가장 큰 불행이라는 문화대혁명의 시작이었다. 마오는 이번엔 린뱌오(林彪)를 후계자로 세웠다. 하지만 세력을 넓히자 마오가 심하게 견제했고, 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하다 몽골사막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숨졌다. 그 후에도 왕훙원(王洪文), 화궈펑(華國鋒)을 차례로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군 원로들이 덩샤오핑을 추대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지만, 안잉의 사망은 중국의 근현대사를 꼬이게 만든 근원이었다. 옛 소련 사례도 마찬가지다. 스탈린이 직접 선택한 후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스탈린의 시신이 채 식기도 전에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했다. 북한 김일성이 60세가 넘자마자 맏아들 김정일을 서둘러 후계자로 내정한 것은 마오와 스탈린의 권력 승계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크든 작든 어느 조직이나 후계 구도는 매우 중요하다. 안잉 사례처럼 기본을 무시하거나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은 본인은 물론 조직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영국 BBC는 대통령 탄핵소추까지 부른 한국 사태를 ‘강아지 게이트’로 명명했다. 달걀 몇 알과 강아지 한 마리가 중국과 한국의 운명을 바꿨다.
조정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