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6-12-31 12:00:00
기사수정 2016-12-31 11:10:09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느 토요일, 100만개를 훌쩍 넘은 촛불로 붉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서울 광화문광장. 중앙 무대에서 사회자가 “여러분, 소등해주세요”라고 외치자 광장을 밝히던 촛불들이 꺼졌다. 1분전까지 광장을 비추던 촛불은 사라지고,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분간 소등이 끝나자 광장의 촛불은 다시 켜지고, 어둠은 자취를 감췄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로 시작하는 노래가 광화문광장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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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가운데 오후 7시 소등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으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10월 29일 처음 시작된 촛불은 토요일마다 타올라 12월 3일 최대 규모인 212만명(주최측 추산)이 참여해 연인원 800만명을 넘으며 헌정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로 거듭났다. 비선 실세의 권력 남용에 분노한 촛불민심은 탄핵을 놓고 갈팡질팡하던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을 이끌어냈다. 촛불은 세대, 지역,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국민들이 위임한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한 권력층에게 ‘참여’를 화두로 엄중한 경고를 보내면서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이라는 원칙을 재확인시켰다. 국민들 사이에서도 적극적인 참여가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전국 각지에서 ‘정치덕후’들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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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게이트 국조특위 청문회가 열린 7일 서울 시내 한 건물에서 시민이 반쯤 가려진 커튼 너머로 청와대를 바라보고 있다. 남제현기자 |
촛불민심은 대한민국의 정치사를 다시 쓰게 하면서 민주주의 발전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하지만 국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필요한 분야는 정치 외에도 많다. 특히 국가 안보를 담당하는 군에도 ‘촛불’과 같은 참여가 절실한 실정이다.
◆ 군 정책투명성 최하위…‘국가안보’ 앞세워 공개 거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투명성이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추진하는 정책들은 대부분 국민들에게 알려진다. 브리핑을 실시해 언론을 통해 알리거나 관보에 게시하기도 하고, 국회에 보고하는 형식으로 정책결정과정이나 추진 실태 등이 공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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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황병산에서 설한지 극복훈련을 실시중인 특전사 대원들이 사주경계를 취하며 전진하고 있다. 육군 제공 |
하지만 군 당국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투명성은 다른 분야에 비해 매우 낮은 편이다. 정부에서 국민의 알 권리와 관련해 운영하는 제도 중 ‘정보공개’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보공개는 국민이 행정기관의 정보에 접근해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고, 행정기관에는 정보공개의 의무를 부과해 자의적인 행정권 행사를 방지하고 국민의 알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운영된다. 국회, 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 정부투자기관,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특수법인 등은 국민이 정보공개청구를 하면 관련 법률에 따라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이에 따라 행정기관은 물론 공기업들도 정보공개 청구요청을 받으면 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문제는 국방부의 경우 정보공개율이 다른 부서에 비해 크게 낮다는 것이다. 올해 1~11월까지 정보공개청구 대상에 포함된 46개 중앙행정기관의 평균 정보공개율은 48.9% 수준으로 국민들의 정보 공개 청구 요청 중 절반 가까이가 받아들여졌다. 반면 국방부의 정보공개율은 19.6%로 평균치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통일부는 47.8%, 외교부는 27.2%, 방위사업청은 26.5%로 외교안보부처의 평균 정보공개율 25.4%조차 충족하지 못했다. ‘국가안보’를 내세워 국민이 알고 싶은 것은 알리지 않고 자신들이 선전하고픈 것만 공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 국민의 참여가 군 ‘일방통행’ 견제할 수 있어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이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따라서 행정부도 국회도 언론도 군에 대한 견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군 복무중인 병사가 부대에서 의문사해도 가족들은 억울함을 억누른 채 장례를 치러야 했다. 이같은 현실은 2000년대 들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가동되면서 국민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지만, 사건 당시 부실했던 조사가 발목을 잡았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 군 의문사인 ‘허원근 일병 사건’은 이러한 사례들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29일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허 일병 부모가 지난해 대법원이 사인이 불분명하다고 결론 낸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다시 재판해달라며 제기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육군 7사단에서 복무하던 허 일병은 1984년 4월 2일 3발의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 군은 자살로 발표했지만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허 일병이 타살됐고 군이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허 일병의 유족은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007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2010년 1심 재판부는 허 일병이 타살된 것으로 판단해 국가가 유족에게 9억2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2013년 2심 재판부는 자살이라고 결론짓고 손해배상도 3억원으로 감액했다. 지난해 9월 대법원은 “사건 당시 군 수사 기관의 부실 조사로 현시점에서 허 일병의 타살·자살 여부를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수 없다”며 군의 부실 조사로 유족이 받은 고통에 대한 위자료 3억원만 인정했다.
반면 국민들의 관심이 매우 높았던 사건의 처리 결과는 달랐다. 2014년 4월 선임병들의 가혹행위로 숨진 28사단 윤 일병(당시 20세) 사건은 전 국민의 관심 속에 수사부터 재판까지 전 과정이 국민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국민들은 가해자들의 진술과 행동은 물론 군 관계자들의 발언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군 당국은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방부 고등군사법원은 6월 3일 윤 일병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파기 환송심에서 가해자 이 모 병장(주범)에게 징역 4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 병장은 계속된 무차별 폭행으로 피해자가 사망할 수 있음을 예견했음에도 이를 용인했다”며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나머지 가해 병사들은 “이 병장의 강요로 폭행에 가담했지만 피해자를 살리기 위한 행위를 진지하게 한 점 등을 고려해 상해치사죄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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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윤일병 집단폭행사망사건 직후 현장검증을 하고 있는 가해자들. 육군 제공 |
윤일병 폭행사망사건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은 국방부는 병영문화혁신을 부르짖으며 군 내 부조리 척결에 나섰다. 하지만 군 인권 옴부즈맨 설치 등 외부에서의 개혁 시도에 대해 국방부는 여전히 거부감이 강하다. 군사법원 폐지나 지휘관 감경권 문제도 과거보다 개선됐다고 하나 사라지지는 않고 있다. 이러한 사안들은 군 내 가혹행위가 논란이 됐을 때 국민적 요구를 의식한 국방부가 마지못해 추진하다가 여론이 가라앉으면 없던 일이 되는 과정을 반복해왔다. 국민들의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이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국방 분야에서 시민의 참여는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내가 알리고 싶은 것만 알릴 테니, 그것만 들어라”는 ‘통보’에 가까운 국방부의 행보는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난, 군 내부의 이익이 우선인 정책을 펼칠 위험을 안고 있다. 주한미군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도 3년 전부터 거론되어왔지만 국방부는 확답을 피하다 2월에야 논의 시작을 알렸다. 논의가 시작된 이후에도 주둔지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대상지로 거론된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졌지만 7월 중순 경북 성주군으로 최종 발표하기까지 사전 논의는 전혀 없었다. 군사작전 펼치듯 보안을 유지한 덕분에 최종 후보지는 공식발표 전까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대가로 지역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경제적, 사회적 손실이 불가피했다.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사전 절차를 거치지 않아 발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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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 햇불을 든 참가자들이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을 하고 있다. |
사드 문제는 군의 정책결정과정의 불투명함을 드러내는 한 예에 불과하다. 지금도 국민들이 모르는 사이에 어떤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이자 철학자였던 스테판 에셀은 젊은이들에게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 분노는 우리를 참여하는 투사로 만들고, 이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 더 큰 정의, 더 큰 자유의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설파했다. 국민들이 군의 행보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본다면, 부조리를 꾸짖는 목소리를 낸다면 군은 좀 더 민주적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조직으로 거듭날 것이다. 국민들이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불의의 어둠을 걷어낸 ‘촛불’로 국방부를 비춰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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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촛불집회에서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면서도 대통령의 즉각 하야를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이제원기자 |
박수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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