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1-03 13:50:47
기사수정 2017-01-03 13:50:46
'문화융성' 방법론 놓고 충돌… '잘못된 만남'으로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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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왼쪽)과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
2013년 8월 유진룡(61)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취임 후 처음으로 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한민족의 저력을 주제로 책을 쓴 작가와 ‘한류’에 관해 대담을 나누는 형식이었지만 내용은 사실상 인터뷰에 가까웠다. 유 전 장관은 박근혜정부의 초대 문화장관에 발탁된 배경과 향후 포부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박 대통령이 문체부 장관 자리를 제안했다. 박 대통령이 내세운 문화융성의 과제는 단지 예술 진흥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을 다져가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 전 장관은 앞선 노무현·이명박 정부 시절 연속으로 권력과 ‘불화’를 겪었다. 노무현정부에선 문체부의 전신인 문화관광부 차관으로 일하다 스스로 그만뒀다. 청와대의 ‘386’ 참모들이 문광부 산하 공공기관장 인사에 개입하며 특정인을 추천하자 이를 거부하려가 정권의 눈밖에 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정부 들어 2010년 그는 청와대 홍보수석에 내정됐으나 스스로 고사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한테 국민이나 국가,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이야기하는 거면 받아들이겠다. 그런데 정권에 대한 충성심, 정치적인 충성을 이야기하는 거라면 못 받아들이겠다”라고 거절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던 그가 박 대통령 취임 후 문화행정 수장으로 발탁되자 문화예술계의 기대감은 대단했다. 행정고시 합격 후 문체부에서만 근무한 정통 문화관료라는 점도 문화예술계의 환영을 샀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유 전 장관의 기분좋은 동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2013년 4월 경북 상주에서 열린 승마대회에 출전한 비선실세 최순실(61·구속기소)씨의 딸 정유라(21)씨가 신통찮은 성적을 거둔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
청와대는 문체부에 대회를 주관한 승마협회를 감사할 것을 주문했다. 감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이번에는 노태강 당시 체육국장 등 문체부 간부 2명의 경질을 요구했다. 박 대통령이 유 전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노 국장 이름을 거론하며 “나쁜 사람이라고 하더라”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된 바로 그 사안이다.
이듬해인 2014년 들어 청와대와 문체부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세월호 참사 후 유 전 장관이 박 대통령 면전에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거나 해양경찰청 해체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면서 둘 사이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그해 7월 박 대통령은 새 문체부 장관이 정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유 전 장관을 ‘면직’시키는 초강수를 뒀다. 3개월 뒤에는 김기춘(78)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주도로 문체부 내 ‘유진룡 인맥’으로 알려진 1급 공무원 3명을 명예퇴직시켰다.
박 대통령이 국회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되고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의혹 수사에 착수하면서 유 전 장관은 연일 박 대통령을 향해 비판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3일에는 한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블랙리스트를 모른다는 박 대통령 발언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처사”라고 날카롭게 꼬집었다.
돌아보면 박 대통령과 유 전 장관은 애초에 문화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던 듯하다. 유 전 장관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이란 우리 국민이 공유해야 할 문화적 가치”라며 “그것은 정부가 만드는 게 아니다”고 단언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에 대해서도 “우리 스스로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싶은지 함께 의논하고 합의해 목표로 삼자는 것이 문화융성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화융성의 방법론과 관련해 박 대통령이 정부 주도 아래 일방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선호했다면 유 전 장관은 민간과 정부가 머리를 맞대고 다양한 대안을 논의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박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는 청와대 참모진의 이런 일방주의적 성향은 끝내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미르재단을 만들면서 한류 진흥과 세계화를 목표로 제시했다. 하지만 유 전 장관은 한류에 대해서도 “정부가 너무 나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문화융성’의 구호 아래 잠시 한 배를 탔던 박 대통령과 유 전 장관의 관계는 ‘잘못된 만남’이었던 것으로 판명이 나고 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