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합병 관여 정황… 국정원 향하는 특검 칼날

문체부 사무실 등 압수수색 결과/국정원 정보관과 수시 연락 확인/이병기 재직 시기와 일치에 주목/국민연금 동향 청와대 보고 정황/특검 “현 단계선 조사 계획 없어” 박근혜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만든 ‘블랙리스트’의 작성·활용에 국가정보원이 관여했다는 의혹이 짙어지고 있다. 국정원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할지 말지를 둘러싼 국민연금관리공단의 내부 의사결정 과정을 은밀히 파악하려 한 정황도 불거졌다. 앞서 국정원이 고위 법관들을 사찰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만큼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국정원 수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온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 중인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수사4팀장을 맡고 있는 윤석열 검사가 4일 특검사무실로 출근하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특검팀은 국정원이 정부부처 동향을 파악하거나 정보 수집 업무를 담당하는 정보관(IO)을 활용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함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거나 이를 토대로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했는지 등을 파악 중인 것으로 4일 알려졌다.

특히 특검팀이 확보한 ‘시도 문화재단의 좌편향·일탈 행태 시정 필요’ 대외비 보고서에는 좌편향 문화 재단의 운영실태와 국가 보조금 삭감 등 조치를 취해야한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문건에는 또 일부 문화재단의 좌편향·독단적 운영으로 지역사회 이념이 오염되고 문화 융성 추진에 방해된다면서 구체적 관리 방안도 제시돼 있다.

특검팀은 이 문건의 양식이 ‘대법원장 동향 보고 문건’과 유사하다는 점을 감안, 국정원 문건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은 이병기(70)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청와대 근무 당시 블랙리스트에 관여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전날 그의 자택을 압수수색해 휴대전화와 각종 서류 등을 확보했다. 공교롭게 이 전 실장이 국정원장으로 일한 2014년 7월부터 2015년 3월까지는 청와대에서 블랙리스트를 활발하게 작성한 시기와도 맞아떨어진다. 이 전 실장은 “단언컨대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했거나 관리한 일이 없다”는 입장이다.

국정원과 관련한 의혹은 블랙리스트뿐만이 아니다.

특검팀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문제와 관련해 국정원 직원 A씨가 국민연금의 내부 동향을 파악해 청와대에 보고한 단서를 잡고 수사 착수를 검토 중이다. A씨는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 결정이 나오기 전인 2015년 6∼7월 안종범(58·구속기소)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에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 위원들의 성향, 합병 찬반을 둘러싼 내부 분위기 등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은 또 국민연금이 당초 제일모직 1주당 삼성물산 0.46주 합병 의견에서 0.35주 합병으로 의견을 바꾸는 데 삼성 측이 보내준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을 조작한 정황도 확인했다. 이와 관련, 특검팀은 지난 3일 최원영(59) 전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청와대 개입 여부를 집중 추궁한 데 이어 5일 김진수(59) 청와대 보건복지비서관을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해 조사할 예정이다.

특검팀은 A씨의 활동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문제에 청와대가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유의미한 정황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지금 당장 ‘전선’을 국정원으로까지 확대하기는 부담스러운 만큼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다. 특검팀 관계자는 “현 단계에서 국정원 관련자들을 조사할 계획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정원은 대법원장 등 고위 법관들의 동향을 은밀히 파악했다는 ‘사찰’ 논란이 불거져 이미 특검팀에 수사의뢰가 이뤄졌다.

김태훈·권지현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