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적자생존’과 메모의 배신

기자는 적는 게 숙명인 직업이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쓴 취재수첩이 수십 권이다. 몇 번 기회가 있었으나 결국 같이 옮겨다녔다. 결혼식 사진처럼 집안 어딘가 상자에 갇혀 있을 게다. 요즘 방송뉴스로 보는 기자들 취재 장면은 어딘가 생경하다. 뉴스의 인물을 병풍처럼 둘러싼 모습은 그대로다. 그런데 기자들은 죄다 스마트폰을 들이밀고 있다. 펜으로 수첩에 적는 것보다 녹음이 쉬울 테니. 그래도 다시 노트북으로 녹취를 풀어낼 테니 ‘적는’ 역할이 바뀐 건 아니다.

박근혜정부 관료들도 적는 게 숙명이었다.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들은 회의 때마다 열심히 받아적었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이다.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식 소통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한 게 있을까. 수석과 장관들이 살아남으려고 적은 메모는 이제 박 대통령에게 부메랑이 되고 있다. 청와대 김영한 전 민정수석과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의 수첩이 그것이다. 헌재 탄핵심판과 특검팀 수사에 유용한 증거로 쓰이고 있으니 ‘메모의 배신’이라고 할 만하다.

‘적자’가 정말 살리기도 한다. 얼마 전 세계일보와 인터뷰한 김광수(59) 전 금융정보분석원장. 2011년 잘나가던 경제관료에서 피의자로 전락했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280일을 감옥에서 보낸 그를 구한 건 단골 카페 여주인의 적는 습관이었다. 여주인은 손님이 어느 테이블에 앉아 무슨 주문을 했고 계산을 어떻게 했는지를 일일이 다 적어뒀다. 그 기록으로 검찰이 돈을 받았다고 밝힌 날에 이 카페에서 후배들과 술을 마셨음을 입증해 무죄를 받아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돈 23만달러 수수 의혹을 반박하기 위해 일기장을 꺼내들었다. 반 전 총장이 2005년 5월 외교부 장관 공관에서 돈을 받았다는 날의 기록이다. 박 전 회장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이 나오고 이름도 비어 있다. 반 전 총장 측은 “23만달러를 준 사람을 이렇게 혹평하는 게 상식에 맞느냐”는 논리다. 일각에서는 일기장이 수수 의혹을 덮는 반대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쨌든 일기든, 수첩이든 적는 습관은 미덕이다. 제 잘못이 없다면 배신당할 일이 있을까.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