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라인] 국정교과서 논란은 혼란을 부르고… '안갯속' 백년대계

박정희 정부 9쪽 그대로 기술 … 친일파 내용 일부 보강 / 현장·완성본 쟁점별 서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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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31일 공개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은 현장검토본에서 총 760곳이 수정됐다.

하지만 ‘대한민국 수립’이라는 표현은 그대로 유지해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정교과서 최종본과 함께 공개된 편찬심의위원회는 집필진에 이어 ‘우편향’이란 지적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교육부가 3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공개한 국정 고교 역사교과서 최종본(오른쪽). 현재 중학교 역사교과서(왼쪽)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 축하식’ 사진과 설명을 게재한 반면 최종본으로 공개된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대한민국 수립’이라고 기술해 ‘정부’가 빠졌다.
세종=연합뉴스
◆최종본은 현장검토본과 ‘대동소이’

국정교과서 최종본의 시대별 수정 현황을 살펴보면 선사·고대 196곳, 고려 82곳, 조선 60곳, 근대 252곳, 현대 144곳, 세계사 26곳 등이다. 현장검토본 의견 수렴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적 사항이 근·현대 부분에 몰린 점을 어느 정도 감안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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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를 제외하고는 1948년 8월15일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는 표현을 고스란히 사용하는 등 큰 틀에서 현장검토본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교 한국사교과서의 박정희 정부 서술 분량이 현장검토본과 마찬가지로 9쪽에 달한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내용 면에서도 박정희 정부의 공적 서술이 지나치게 많다는 지적을 받은 현장검토본에 비해 새마을운동의 부정적 측면 한 줄만 늘었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장검토본에서 ‘축소 서술’이라고 비판 받은 친일파 관련 내용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내용 등은 최종본에 일부 보강됐다. 친일파의 친일행위를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규명 보고서’에 따라 5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구체적으로 제시했으며, 위안부와 관련해서는 수요집회 1000회를 기념해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 사실 등을 추가했다.

이 밖에 제주 4·3사건과 관련해 ‘사건의 진상은 남북한 대치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고, 공산주의자로 몰린 무고한 희생자들은 물론 그들의 유족까지 많은 피해를 당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광복 이후 추진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의 한계가 보다 명확히 기술되고, 특정 기업인의 일화를 소개한 내용도 교체됐다.

이영 교육부 차관이 31일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브리핑룸에서 국정 중·고 역사교과서 최종본 내용과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발표하고 있다.
세종=연합뉴스
◆편찬심의위원회도 우편향 논란


그동안 비공개로 일관했던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회 명단도 이날 공개됐다. 편찬심의위는 전문가 6명과 교원 4명, 학부모 2명 등 총 12명으로 구성됐다. 교육부는 애초 16명을 위촉했으나 4명이 일신상의 이유로 중도사퇴했다고 설명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꾸린 집필진과 달리 교육부가 위촉한 편찬심의위는 교과서 검토와 의견 개진 등의 역할을 맡았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수성향의 ‘뉴라이트’ 활동을 한 것으로 드러나 집필진에 이어 또다시 우편향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된다. 또 편찬심의위 전문가 중 한국사 전공자가 6명 중 2명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됐다.

편찬심의위원장인 이택휘 전 서울교육대 총장은 2000년대 초반 ‘좌편향 교과서’를 바로잡겠다며 발족한 뉴라이트 단체 ‘교과서포럼’ 창립기념식에 참석한 바 있다. 한국사 전공자인 허동현 경희대 한국현대사연구원장과 강규형 명지대 교수도 교과서포럼과 ‘한국현대사학회’ 등 뉴라이트 성향 단체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다.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 역시 대표적인 뉴라이트 성향 학자다.

이 밖에 국무총리실 납북피해자 보상·지원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호섭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과 이성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전문가에 포함돼 있다. 이 명예교수는 지난해 말 교육부의 국·검정 혼용 방안 발표 직후 사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교원으로는 정한숙 옥천여중 수석교사, 윤춘옥 인천예일고 교사, 김명철 서경중학교 교감, 황선경 명덕여고 교사가, 학부모 위원으로는 교사 출신인 이철문씨와 김동순 교과서분석연구회 대표가 각각 참여했다.

◆지정 거부에 금지법까지…국정교과서 험로만 남아


교육부가 31일 공개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이 일선 학교 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올해부터 국정교과서를 사용할 연구학교 지정이 많은 시·도 교육감들의 반대에 직면한 데다 정치권의 국정교과서 폐기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서울과 경기 등 13곳은 연구학교 지정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연구학교 지정 권한이 교육감에게 있어서 교육청이 협조하지 않으면 연구학교 지정이 어려워진다.

이와 관련해 이영 교육부 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연구학교 신청 여부는 단위학교의 자율성에 달린 문제”라며 “최대한 교육청들과 협의하는 방향을 택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 중인 중·고교 검정 역사교과서의 집필진은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교과서 집필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들은 집필기준의 문제와 집필기간 부족 등을 이유로 새 교육과정의 개정과 적용 연기 등을 주장했다. 이에 따라 교육부의 국정교과서 현장 적용 방안에도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지난 20일 국회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중단 및 폐기 촉구 결의안’이 가결된 것도 교육부으로서는 부담이다. 결의안에는 국정교과서 추진 중단과 검정교과서로의 전환을 위한 행정절차 진행, 최순실씨의 국정교과서 추진과정 개입에 대한 수사 촉구 등의 내용이 담겼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역사교과용 도서 다양성 보장에 대한 특별법’(국정교과서 금지법)이 본회의에 상정돼 제정되면 국정교과서는 자동 폐기된다.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정교과서 금지법’ 제정안은 역사 과목에 국가가 저작권을 가진 교과용 도서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정교과서 금지법이 법사위에서 난항을 겪으면 야당은 국회의장 직권상정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상황에 따라 여야가 국정교과서 금지법을 협상 카드로 사용해 본회의 표결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현 국회 구성이 여소야대인 점을 감안하면 본회의에 상정될 경우 통과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이 차관은 국정교과서 금지법과 관련한 질문에 “국정교과서가 선택 가능한 교과서 가운데 하나로 사용된다면 교과서의 다양성을 보장하라는 국정교과서 금지법의 최초 발의 취지는 이뤄진 것이고 국정교과서를 못 쓰게 하는 것이 오히려 법 취지와 반대로 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따른 ‘벚꽃 대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면서 일각에서는 정권교체와 함께 국정교과서의 생명력도 끝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밀실행정" vs "물타기"… 보혁·학계 모두 비판

31일 공개된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 최종본과 새 교육과정에 따른 검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두고 보수와 진보 등 이념성향을 떠나 교육부를 향한 날 선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표적 보수성향 학자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역사교육)는 “교육부 스스로 국정교과서 도입 취지를 부정하는 행태”라며 “집필진이 여러 가지 의견이나 입장을 감안해 최종 정리한 것인데, 이를 관료들이 정치권 눈치를 보고 수정한 것은 유감”이라고 지적했다.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교육부가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최종본을 낸 점은 긍정적”이라면서도 “다만 건국절 논란 등 역사적으로 논란이 된 사건에 애매한 기준을 들고 나와 혼란이 우려된다”고 평가했다.

진보 진영은 “국민적 반발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물타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직 고교 교사인 김태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논란이 된 박정희 정권 부분의 경우 공과(功過)를 균형 있게 기술했다고 하는데, 전반적으로 미화하다가 막판에 과를 한두 줄 집어넣는 게 어떻게 균형 잡힌 서술이냐”고 되물었다.

시민사회·학계의 비판도 이어졌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날 논평을 내고 “국정교과서 최종본은 교육현장과 학계, 시민사회가 시종일관 주장한 권력의 역사 해석 독점 방지와 동떨어져 있다”며 “더 큰 문제는 편향서술과 친일·독재·재벌 미화의 기조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사학)는 “집필기준에서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건국 문제를 전혀 수정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라며 “기존 검정교과서에서 따로 구성돼 있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을 같은 장에서 기술해 박정희 정권을 미화한 것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교과서 반대 입장을 고수해온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국정교과서의 가장 큰 문제는 국정화 정책 그 자체”라며 “시작부터 반민주주의였고 과정은 편법과 졸속이었으며, 그 결과는 반교육적인 수준미달 교과서로 나타났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박근혜 정부의 ‘박근혜 교과서’, 최순실의 개입 정황이 드러난 ‘최순실 교과서’, 박정희 명예회복을 위한 ‘박정희 교과서’는 단 한 권도 연구학교에 보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종=김주영·송민섭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