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냉전시대 잣대로 ‘빨간 딱지’ 낙인… 도서 블랙리스트 논란

2017 금서 파동 / 1970∼90년대 불온서적 판매 혐의… 검 ‘노동자의 책’ 사이트 운영자 기소 / 이적표현물로 지목 130권중 88권… 국회도서관에서도 열람할 수 있어 / 온라인 서점선 95권까지 구매 가능… 소지·판매 범법행위 말 무색케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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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가 2017년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사상과 주의·주장에 따라 편을 가르고 ‘우리 편’이 아니면 불이익을 주고 탄압했다. 분노가 크지만 2000년대 들어서도 계속되었던 ‘금서파동’을 떠올리면 사실 낯선 상황도 아니다. 블랙리스트 파문의 한 켠, 또다른 금서 목록이 제시됐다. 1970∼90년대 출간된 서적들을 문서파일로 제공하는 ‘노동자의 책’이란 사이트를 운영하던 이진영(48)씨가 ‘불온서적’을 소지하고 판매한 혐의로 지난달 구속기소됐다. 검찰의 불온서적 목록을 입수해 분석한 결과 ‘세계적 고전’으로 평가되어 학술자료로 널리 사용되고 출판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되는 서적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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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불온서적’… “검찰은 읽어나 봤을까”

‘무엇을 할 것인가’(1991년 출간)는 검찰이 이씨를 구속하며 “(러시아의 사회주의혁명을 이끈) 레닌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내용”이라고 주장한 책이다. 책을 낸 출판사 관계자는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출간된 시기 자체가 레닌에 앞서는 소설”이라며 “검찰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책은 1860년대 러시아 젊은이들의 낙관주의, 과학, 남녀·계급 평등, 인간의 선한 본성에 대한 믿음 등을 담고 있다.

검찰이 불온서적으로 지목하며 내세운 이유들 중에는 이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다. 리기영의 ‘두만강’(1989)도 그중 하나다. 리기영의 소설 ‘고향’을 책임 편집한 카이스트 이상경 교수(인문사회학)는 “‘두만강’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와 비슷한 성격”이라며 “해방 이전 노동·농촌문제를 다뤘지만 김일성 등 북한과 관련한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만강’은 국내에서만 학위논문 등 34건의 관련 연구가 축적돼 있다.

이적표현물로 지목된 ‘세계철학사’(1989)를 지난달 다시 펴낸 ‘중원문화’ 측은 “검찰 기준으로 보면 엄혹한 시절이라 민감한 내용을 뺐던 1989년판보다 오히려 최근 판이 ‘문제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책이 수천 페이지가 되는데 검찰·법원에서 읽어는 봤겠느냐”며 의문을 제기했다. 

학계·출판계에서 황당하다는 반응까지 보이는 기준을 검찰이 적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검찰이 적용한 판례 130건(적용 판례가 복수일 경우 앞선 시기의 것을 1건으로 집계) 중 1980년대 것이 46건(35.3%), 1990년대 것이 74건(56.9%)이다. 냉전적 세계질서, 남·북한의 대립이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파르던 시절의 판단을 2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이제는 학술자료로서 의미가 큰 책들에 ‘사회주의 혁명 선동’, ‘폭력투쟁’ 등 철 지난 단어들을 동원해 ‘빨간 딱지’를 붙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

소련의 정치가인 크루프스카야의 ‘레닌의 추억’(1986), 세계적 역사학자인 E·H 카의 ‘러시아혁명’(1986)은 “사회주의 혁명을 부각한다”, “운동권 학생들에게 좌경적 혁명 방법을 익히려는 목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철학의 빈곤’(1988), ‘독일이데올로기’(1989)는 “자본주의 멸망의 필연성을 논증”, “미래공산주의 혁명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라고 규정했다.

‘강철서신’(1989)이나 ‘김일성선집’(1988), ‘김일성사상비판’(1988) 등 북한 저자이거나 주체사상, 북한정권을 다룬 서적도 다수 있었지만 학계에선 “학술 연구용으로 쓰이는 일이 많다”고 평가한다. 한신대 배성인 교수(정치학)는 “수십년 전 책을 읽는다고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접근 자체가 오류”라고 비판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확정한 판례를 바탕으로 했다”며 “이적표현물들을 내부검토한 뒤 상급기관에 보고해 이적성 여부를 조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소지·판매가 문제?… 인터넷선 웃돈 얹어 거래

검찰은 이씨가 불온서적을 소지하고 판매한 것을 문제삼았다. 해당 서적을 갖거나 유통시키는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인데 해당 서적은 도서관이나 서점,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게 읽히거나 거래되고 있다.

5일 세계일보가 검찰이 지목한 책 130권을 국회도서관에서 검색해 본 결과 88권(67.6%)이 열람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출판사를 옮겨가며 출간되고 거래되는 책도 상당수다.

교보문고 등 주요 온라인서점 4곳(중고장터 포함)에서는 95권(73%)이 구매가 가능한 것으로 나타나 ‘이적표현물’이란 표현을 무색케 했다. 출간된 지 오래돼 절판된 서적은 웃돈까지 얹어 거래된다. ‘녹슬은 해방구 1∼9권’(1989)의 경우 정가가 3만6000원이지만 중고장터에 14만원과 27만원(91년판)에 올라오는 등 일부 서적은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정가 1만4000원인 ‘붉은바위 상·하’는 5만원에, 정가 2만원인 ‘두만강 1∼5권’(1989)은 9만원에 올라와 있다. 책의 희귀성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판단 기준 애매… 수사기관도 골머리

검찰의 엉성한 리스트는 과거부터 이어진 공안수사의 ‘관성’ 탓으로 풀이된다. 수사기관에 이적표현물을 제대로 감정할 만한 전문성 있는 기관이 없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1988년 설립된 이래 7만여건의 이적감정을 수행했던 경찰청 산하 공안문제연구소(공안연)는 2004년 열린우리당 최규식 의원이 “공안연구소장이 연구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보단체의 조직감정을 강행했다”는 제보를 공개하면서 파문이 인 뒤 이듬해 사라졌다.

경찰 관계자는 “공안연이 사라진 후 마땅한 수단이 없어 북한학 교수 등 외부에 유료감정을 맡긴 뒤 수사자료에 첨부하고 있다”며 “이적성 기준이 모호해 사실상 판례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불온서적을 정하고 규제하는 것에 대해 전문가들의 시선은 엇갈렸다. 인권중심 사람의 박래군 소장은 “신비주의가 오히려 ‘자생적 김일성 주의자’를 만들었다. 무조건 감추는 것은 역효과”라며 “시민들의 지성을 믿고 공론장에서 자연스레 사라지도록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안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이적표현물 선정은 필요하다”며 “법을 남용하는 것은 문제지만 극단적인 표현의 이적물까지 허용하는 것 역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이창수·이창훈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