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재수생인데 졸업식은…" 좌절부터 먼저 배우는 학생들

졸업식 불참하는 학생들… 일그러진 '성공지상주의' / 상급 학교 진학·취업 실패 자책/ 상대적 박탈감 느낄까봐 못 가/ 졸업장은 친구에 부탁… 학원으로/ 특목고 불합격 중학생도 불참/“희망보다 좌절을 먼저 배울 것/ 실패 용인·응원하는 문화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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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정시 전형에서 모두 떨어졌어요. 졸업식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죠. 졸업식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졸업장을 받으려고 어쩔 수 없이 다녀왔어요.”

재수를 준비 중인 김모(18)양의 한숨은 깊었다. 졸업식이 열린 건 지난 7일. 가족들이 졸업식장에 오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말렸다. 최근 서울 강남의 한 재수종합학원 재수선행반에 등록한 김양은 수험 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을 만나면 상대적 박탈감만 느낄 게 뻔하다.

학창시절의 한 과정을 무사히 끝낸 걸 축하하고 새로운 시작에 나서는 즐거운 의례인 졸업식. 그러나 모두가 졸업식을 축제로 만끽하는 건 아니다. 상급 학교 진학에 실패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이들 중에 ‘빛 바랜 졸업장’을 자책하고 혼자 조용히 2월의 졸업식을 보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모(18)양은 9일 열리는 졸업식에 아예 가지 않을 생각이다. 최양도 재수를 준비 중이다. 서울의 집 근처에 재수학원이 있지만 뒤숭숭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지난달 집을 떠나 경기도의 한 기숙학원에 들어갔다. 최양은 “졸업식 날 학원에서 강의를 들을 것”이라며 “일분일초가 아깝고 내년 이맘때 똑같은 실패를 겪지 않으려면 치열하게 공부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졸업장은 친구에게 대신 받아 달라고 부탁해놨다.

최양과 같은 날 졸업하는 이모(18)군도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탓에 졸업식에 오기로 한 어머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 이군은 수시 전형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시고 재수를 결심했다. 정시 전형에서 하향 지원한 대학에 합격하긴 했지만 부모님과 상의해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군은 “수능 성적이 잘 나오거나 대학에 붙은 친구들이 부러울 따름”이라며 “수능 당일 가채점한 결과를 사설 학원 등급표 등과 비교해 보니 모든 과목이 1등급씩 떨어져 3일간 학교에 가지 않았다”며 고개를 떨궜다.

입시경쟁에서 자유롭지 않은 중학생들까지 쓸쓸한 졸업식을 보내기도 한다. 특수목적고나 자율형사립고 진학에 실패한 중학생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씁쓸한 풍경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한 안모(15)군은 지난 3일 중학교 졸업식에 가족 없이 혼자 참석했다. 원하는 과학고에 당당히 합격해 졸업식 날 친척들의 축하를 받고 싶었지만 2차 전형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안군의 부모는 아들의 과학고 진학을 위한 사교육비로 매달 200만원이 넘는 돈을 지출했다.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안군은 “엄마가 과학고에 가는 친구의 엄마를 만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며 “한사코 졸업식에 오겠다는 엄마를 겨우 말렸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성공’에 대한 과도한 열망이 학생들이 졸업식을 그 자체로 기념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진단한다.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사회학)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게 성공과 직결된다는 사회 분위기는 부모들에게 명문 학교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적으로 실패를 용인하고 뒤처지는 학생을 응원하는 문화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10대들은 희망보다 좌절을 먼저 배우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김지현·박진영 기자 becreative0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