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영양 서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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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는 서석지는 주일재에서 책을 읽고 사우와 더불어 자연을 완상하는 ‘겸손’한 주인의 오롯한 정원이다. |
# 오뚝한 산, 유장한 물을 품은 경북 영양
두메라는 말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의 안쪽 깊은 곳을 가리키는 우리말이며, 자연스럽게 뒤에 산골이라는 단어가 단짝처럼 따라붙는다. 지금이야 워낙 교통이 발달하고 어디든 손 안에 들어있는 스마트폰으로 검색해서 콕 짚으면 경로와 지역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지구의 어디라도 우리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아직도 심리적으로 두메나 오지라는 말을 듣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영양(英陽)군은 경상북도에서 가장 고지대에 있으며, 울릉군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적고 육지에서는 첫 번째로 인구가 적은 행정구역이라고 한다. 볕이 좋아 맵싸하고 달콤한 이 고장 특산물 영양고추가 잘 자라는 곳이며, 인물도 많이 나온 곳이다.
우리가 잘 아는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으로 시작하는 ‘승무’를 쓴 대표적인 현대시인 조지훈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며, ‘빈 가지에 바구니 걸어놓고 내 소녀 어디 갔느뇨… 박사의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라는 짧지만 강렬한 시 ‘내 소녀’를 썼던 오일도가 자란 곳이다. 또한 소설가 이문열도 이곳에서 자랐다. 말하자면 문학 기행만으로도 하루 종일 돌아다닐 만한 곳인데, 많은 사람이 영양이 좋은 곳이라는 것을 잘 모른다.
나 또한 나름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 헤집고 다녔다 자신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곳과는 인연이 닿지 않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꼭 가보리라 여러 해 다짐하다가 지난 1월, 별다른 일이 없었던 토요일 새벽에 무턱대고 눈을 비비며 차를 몰고 떠났다.
일단 영양으로 가는 명분은 서석지(瑞石池)와 사월종택(沙月宗宅)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석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이고, 사월종택은 반가의 품위를 보여주는 집으로 그 명성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영양이라는 땅의 생김새가 궁금하기도 했다.
직업이 건축가이고 여러 곳에 집을 지으러 다니다보니 많은 땅을 만난다. 여기서 땅이란 의미는 산과 물과 하늘과 흙으로 이루어진 공간을 말한다. 그리고 그 땅은 사람처럼 고유의 성질이 있고 품이 다르고 성질도 모두 제각각이다. 잘생긴 땅도 있고 험상궂은 땅도 있고 순박한 땅도 있고 영리하고 냉정한 땅도 있다. 혹은 사람을 반기기도 하고 문전박대를 하기도 한다. 눈치가 있다면 그걸 알아야 하고 적당히 비위도 맞춰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대책 없이 쳐들어가고 아무 생각 없이 말뚝을 박고 자기 땅이라고 우기다가 큰코다치기도 한다. 사람의 역사라는 것이 사실 알고 보면 땅과 어우러져서 살아온 역사가 전부이다. 사람과 땅 사이에는 오랜 역사와 친분이 있지만 땅과 친해지고 땅과 화합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지 않다.
땅은 사람을 고른다. 맞는 사람을 고르고 자리 잡게 한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그 땅으로 들어가서 진심으로 섬기면 그곳에서 별 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명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땅 나쁜 땅을 찾지 말고 나에게 맞는 땅을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준다. 그곳이 바로 당신에게는 명당이라고.
나도 땅을 찾는다. 내게 맞는 땅 혹은 내가 들어가서 살고 싶은 땅. 흘끔흘끔 길을 다니다가 차에서 내려서 흙을 만져보고 바람을 맞아보며 측정하는데, 사실 여기저기 좋은 땅은 참 많이 있다. 부동산적인 가치는 잘 모르겠고, 내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처음 갔을 때의 인상이다.
그렇게 본 땅 중에서 내가 가장 살고 싶었던 곳은 진평왕릉에서 선덕여왕릉으로 가로질러가는 경주 낭산 어귀의 어느 동네였는데, 땅이 호방하면서도 포근한 것이 나를 기다리는 땅처럼 느꼈다. 그런데 이번 영양에 가서 그곳에 필적하는 좋은 땅을 보았다. 산이 오뚝하지만 사람을 짓누르지 않고 물이 유장하면서도 사람을 겁박하지 않으며 땅이 맑고 공기가 투명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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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경정, 정면으로 보이는 집이 주인의 공간 ‘주일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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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지는 17세기 초반에 정영방(鄭榮邦)이라는 사람이 공부하고 손님을 맞는 별서(別墅)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다. |
# 경계를 알 수 없는 조선의 정원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영양을 찾아간 날은 따스하고 포근하던 올겨울이 갑자기 표변하여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듯 영하 10도 아래로 기온을 떨어뜨리고 존재감을 드러내던 날이었다. 잠깐만 밖에 있어도 손발이 찌릿하고 몸이 어는 것 같았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차 옆으로 휙휙 지나가는 산들의 풍경이 아주 장엄했다. 서안동 인터체인지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가자, 갑자기 다른 세계로 들어온 듯 다른 차원의 정적이 차 안까지 스며들었다.
영양으로 접어들며 제일 먼저 산해리 크게 휘어가는 강 옆에 우뚝 서있는 신라시대에 누르스름한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쌓아놓은 오층석탑을 보았고 아주 평온한 땅을 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가서 영양읍내로 들어가기도 전에 문득 서석지가 나왔다.
서석지는 17세기 초반에 정영방(鄭榮邦)이라는 사람이 공부하고 손님을 맞는 별서(別墅) 공간으로 조성한 곳이다. 마을 초입의 조금 높은 대지에 물길을 내서 연못을 조성하고 그 연못 동쪽과 북쪽에 크고 작은 건물 두 채를 앉혔다. 그리고 그 뒤와 옆으로 부속채가 있다. 그게 서석지의 전부이다. 서석지라는 이름의 의미는 상서로운 돌이 있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의 주인공은 한가운데 있는 네모진 연못이다. 그래서 이곳은 건축보다는 정원으로 유명하다. 정원이란 자연을 담을 쳐서 가두어두는 곳이다. 동서양의 정원의 어원을 살펴보면 모두 울타리가 들어가 있다.
“정원을 나타내는 한자어인 포(圃), 원(園), 유(?) 등 한자의 생김새와 ‘에워싸다’라는 뜻의 부수인 ‘큰입 구(口)’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동양 문화권에서는 정원이라는 말에 본질적으로 담을 쌓아 공간을 주변으로부터 독립시킨다는 뜻이 있다. 서양에서도 영어 가든은 위요를 가리키는 라틴어 ‘가리디눔(gardinum)’에서 온 말인데, 히브리어에서 기원을 찾으면 울타리나 보호와 방어를 뜻하는 ‘간(gan)’과 즐거움이나 기쁨을 뜻하는 ‘오덴(oden)’ ‘에덴(eden)’이 합쳐진 것으로 본다.” - 이유직 ‘한국건축개념사전’
그런데 우리에게 정원은 참 애매한 장소이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가 정원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대부분 경계가 애매한 외부공간일 뿐이다. 그런 특징이 한국 전통 정원을 규정하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선문답 같기도 하다.
들리는 말로는 삼국시대의 정원은 그와 좀 달랐고 고려시대의 정원도 그와는 좀 달랐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조선의 정원은 대체 어쩌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호방하면서도 의미를 가득 부어넣은 중국의 정원이나 자연을 얼리고 축소해서 선 안에 몰아넣고 감상하기 적합하게 조성된 일본의 정원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는 정원의 경계를 알 수 없다. 정원이라 말하니 정원이구나 생각하지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사람의 손이 들어간 곳은 어디인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조선의 정원에 가게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읽어내고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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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과 들이 어우러진 영양 산해리 봉감모전석탑. |
# 서석지, 책을 읽으며 사우와 더불어 자연을 완상한 ‘겸손’한 주인의 오롯한 정원
정영방은 경북 예천 사람이었다. 그는 예학의 종장이며 병산서원, 대산루 등 명건축을 만들었던 우복 정경세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낙향해서 살며 유유자적했다. 그런 그가 고향과는 조금 떨어진 영양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처가인 무실을 오가며 눈여겨보았던 장소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낮은 담과 건물이 두 채 직교하고 있는 서석지는 겨울이라는 계절에 보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꽃이 피고 잎에 물이 도는 봄이나 은행나무 단풍이 그토록 화려하다는 가을에 와야 하는 곳에 겨울에 간 건 한적함을 기대해서였는데, 도착하고 보니 그런 정취는 없을 듯했다.
담의 옆구리에 슬그머니 붙어있는 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서석지의 네모난 연못이 보이고 건너편 사우단(四友壇)이 보이고 그 뒤로 정영방이 책을 읽던 서재 주일재(主一齋)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밖에서는 두 사람이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다가 나를 반기며 불을 좀 쬐라고 했다. 주일재에서 지역 특산물 홈쇼핑 촬영을 이틀째 하는 중인데, 오늘은 그래도 햇볕이 나서 좀 낫다며 뒤로 돌아가서 판으로 된 바라지문을 열고 연못 쪽을 찍으라고 정보를 주었다.
나는 불을 쬐며 사우단을 바라보았다. 서쪽으로 열린 전망을 원경으로 삼고 서석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연못을 근경으로 삼으며 연못과 주일재 사이에 작은 단을 만들어 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를 심어 ‘사우단’이라 이름붙인 것인데, 한겨울이라 지금은 그 위세를 알 수 없었다.
주일재 앞에 몰려 있는 60여개의 서석에 각기 이름을 붙여 마치 꽃밭에 꽃을 심어놓듯 의미를 심어놓은 풍경이 절경인데, 물이 마르고 바위만 그 성질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400년 된 은행나무처럼 팔을 활짝 펴고 활달하게 웃고 있는 경정(敬亭)을 봤다. 경정은 주일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척 크다. 그리 넓지 않은 부지를 은행나무 거목, 연못과 더불어 가득 메우고 있는 건물이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 반 규모에 날개를 활짝 편 새처럼 팔작지붕으로 지어놓았다. 그리고 한 칸씩 두 개가 있는 온돌을 제외하면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어 사실은 누마루 같은 공간이다.
그런데 건물의 크기에 비해 출입이 매우 제한적이다.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측면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전부이다. 그리고 연못 쪽으로는 계자난간이 둘러쳐져 접근이 불가능하다. 즉 경정은 연못을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행위는 배제된 공간이다. 보통 누마루를 둘렀다고 해도 건물 전면으로 폭이 좁아도 약간의 여유가 있는 법인데, 이곳은 단호하게 그런 관계를 단절했다. 주인의 의도가 명확히 보이는 구성이다. 아주 간결하고 단순한 동선을 만들고 그 안에서의 행동까지 제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연못은 산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끌어들이는데, 들어오는 수문을 읍청거(?淸渠)라고 하여 주일재 옆에 두고, 물이 나가는 곳은 토예거(吐穢渠)라 이름 붙여 서석지로 들어오는 문 앞에 두었다. 지형과 방향을 고려하여 집을 배치하였지만 주일재에서 나와 경정으로 물이 빠지는 구성은 공간의 균형을 잡고 주인의 위치를 나타내는 숨겨진 의도로 보인다. 손님들은 물이 나가는 토예거를 지나서 경정에 오르고 그 위에서 구경하고 자연에 대한 공경을 표하면 되는 것이다.
주인의 공간 주일재는 마루 한 칸, 방 두 칸의 아주 단출한 건물이다. 직교하며 이웃한 경정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몸짓을 하고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은 그곳을 부속 공간 정도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바로 주인의 공간이고 화려함의 안쪽 깊숙이 숨겨놓은 공간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는 서석지는 주일재에서 책을 읽고 사우와 더불어 자연을 완상하는 ‘겸손’한 주인의 오롯한 정원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