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2-19 22:34:35
기사수정 2017-04-11 13:28:39
자위대 일일보고 용어 논쟁 시끌
전투를 무력충돌… 단어 바꿔치기
신뢰 입에 올리나 기준은 모호
장기적 日도 불리… 관계회복 시급
최근 일본 국회에서는 ‘전투’라는 용어를 놓고 정부와 야당 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미 폐기했다”고 주장했다가 “뒤늦게 찾았다”고 말을 바꾸며 최근 공개한 남수단 평화유지활동(PKO) 파견 자위대의 ‘일일보고’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남수단 수도 주바에서 정부군과 반정부세력이 격돌한 상황에 대해 현지 부대는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 전투 발생, 150여명의 사상자 발생 추정”이라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무력 충돌은 있었지만 전투는 없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전투라는 표현일 뿐 법적인 의미에서의 전투가 아니다”고 우기고 있다.
일본 정부가 ‘전투’라는 단어를 꺼리는 것은 위헌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헌법 9조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의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있다. 자위대가 전투에 말려들어 무력을 사용하는 상황이 생길 경우 헌법 위반이 된다. 또 일본의 PKO 관련법에 있는 ‘PKO 파견 5원칙’에는 ‘휴전 합의’가 전제조건으로 명시돼 있다. 휴전 상황이라면 전투가 벌어질 수 없다. 따라서 전투를 인정하면 PKO를 철수시켜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투’를 ‘무력충돌’이라는 단어로 바꿔치기해 헌법마저 무력화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말장난’으로 헌법을 무력화하는 장면은 왠지 낯설지 않다. 아베정권은 2014년 7월 각료회의(국무회의)에서 헌법 해석을 변경해 역대 내각에서 금지해 온 자위대의 집단자위권 행사를 허용했다. 이를 바탕으로 안보관련법을 만들어 집단자위권 행사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법은 지난해 3월 시행됐지만 위헌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런데 아베정권은 오히려 ‘현실에 맞게 헌법을 고치자’며 개헌의 빌미로 삼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면 무엇이든지 팔 수 있다는 판매왕이 청정지역에서 방독면을 팔기 위해 그곳에 방독면 공장을 지어 공기를 오염시키고 그로 인해 방독면이 필요해진 이들에게 방독면을 팔았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베 총리는 ‘신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기준은 그때그때 다른 듯하다. 박근혜정부가 출범 때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 정상회담도 없다’고 선을 그었을 때 아베정권은 ‘역사 문제와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른 문제는 분리해서 접근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을 빌미로 올해 초 주한 일본대사를 일시귀국시키면서 한·일 통화스와프 논의 중단 등 전선을 확대했다.
아베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우는 것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일본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으려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발효되기도 전에 트럼프 대통령은 ‘영구 탈퇴’를 선언했다. 무려 12개 국가가 한 약속을 깼다. 그런데 아베 총리가 트럼프정부에 “국가 간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하는 모습은 없다. 되레 “신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논리라면 2015년 12월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도 한국의 대통령이 바뀌면 안 지켜도 그만이라는 얘기가 된다. 하긴 당시 국회 동의 절차도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정부와 아베정권 사이의 합의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더구나 “이면 합의는 없다”는 양국 정부의 말을 믿는다면, 한국 정부는 소녀상 ‘이전 노력’을 약속했다. 철거를 약속한 게 아니다. 학생(박근혜정부)이 노력하겠다고 약속하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머리가 나빠 성적이 좋지 않았을 때 ‘신뢰’를 거론하는 게 이치에 맞는 것일까. 더구나 그 학생은 급성 질병에 걸려 회복이 될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주한 일본대사를 일시 귀국시키는 강경조치로 재미를 본 아베정권은 ‘한국이 움직일 때까지’만 외치며 여태 그를 붙잡아두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국 대선후보들이 한·일 관계 구상을 밝힐 때 긍정적인 얘기를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양국 관계는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멀리 내다보면 일본에도 좋을 리 없다. “한 푼 아끼려다 백 냥 잃는 줄 모른다”는 일본 속담을 잘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상규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