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2-25 00:51:47
기사수정 2017-04-11 14:20:30
그림 위작은 절도와 다른 차원… 천재성, 자존심으로 진짜 능가 / 나쁜 가짜는 진짜를 베끼지만 좋은 가짜는 진짜를 훔친다
1990년대 초에 유행했던 신신애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에서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친다”의 ‘짜가’라는 가사는 절묘하다. ‘가짜의 가짜다움’을 ‘가짜’라는 단어조차도 뒤집은 ‘짜가’로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때의 가짜는 누가 봐도 가짜였기에 진짜를 위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사회적 이슈인 ‘가짜뉴스’에서의 가짜는 소위 ‘카더라 통신’이나 ‘증권가 지라시’보다 더 진화하거나 악화된 형태이기에 더욱더 위험하다. ‘가짜 같지 않은 가짜’여서 진짜와 쉽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중국 포털 사이트에 한류스타 김수현과 걸그룹 출신 배우 안소희가 4월에 결혼한다는 가짜뉴스가 떴었다. 예전에도 보도됐던 애매한 열애설이 아니라 확실한 결혼설이 4월이라는 구체적 근거와 함께 뉴스처럼 보도된 것이다. 곧바로 가짜뉴스로 판명이 났지만, ‘별에서 온 그대’라는 판타지가 아닌 ‘지구에서 결혼하는 연예인’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상했던 팬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을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가짜인생’들로 인한 폐해도 심각하다. ‘온라인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이들은 자신의 실제 삶이 아닌 남의 인생을 거짓으로 산다. 스타인 척하며 사칭한 트위터 계정으로 글을 쓰거나, 렌트한 명품 외제차를 자신의 차인 양 인증샷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식이다. 남의 전문지식을 끌어와 자신의 스펙으로 둔갑시켜 블로그를 운영하기도 한다. 이런 ‘유혹적인 가짜’들은 타인의 시간과 노동, 감정까지도 강탈해간다.
당연히 이런 가짜뉴스나 가짜인생에서의 가짜들은 사회적 범죄이다.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 문제 삼는 가짜의 의미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도 미묘하다. 가짜에게 면죄부를 준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사실이 아닌 진실, 결과가 아닌 원인, 대답이 아닌 질문을 통해 가짜의 실체에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면 가짜로 사는 것의 지난함이나 가짜와 다를 바 없는 진짜의 허위까지도 두 겹 세 겹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가령 일본소설이 원작인 한국영화 ‘화차’에서는 사채 빚이나 사망 보험금과 연관된 경제적 빈곤이나 부당한 폭력으로 인해 신분 세탁을 해야 했던 ‘여자 리플리’가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가짜인생을 살았지만 신분이 발각되자 그녀는 ‘진짜인 듯 진짜 아닌 진짜 같은’ 자신을 진짜로 사랑한 남주인공에게 말한다. “나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쓰레기야.” 이 말은 가짜인생을 산 소위 ‘인간 쓰레기’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진짜 고백이었을 터이고, 이때 흘린 것은 짠 내 나는 진짜 눈물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미해결인 천경자나 이우환 그림을 둘러싼 위작 논쟁에서 확인되듯이 미술계에서의 가짜 문제 또한 다른 측면에서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다. 노아 치니가 쓴 신간 ‘위작의 기술’을 보면 돈이 목적인 절도범과는 달리 위조범은 천재성이나 자존심, 복수심, 권력욕 때문에도 가짜 그림을 생산한다. 전문가나 소비자 또한 그것이 가짜임을 알고도 인정하지 않거나 방조하기도 한다. 이 책이 “세상이 속기를 원하니, 그렇다면 속여주마”라는 페트로니우스의 말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짜를 능가하는 미끼가 바로 가짜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에서의 가짜뉴스나 가짜인생에서와 달리 예술에서의 가짜는 여러 가지 불편한 진실들을 전달한다. ‘진짜였던 가짜’나 ‘진짜가 될 가짜’까지도 호출하기 때문이다. 진짜가 아니면 모두 가짜라고 치지도외(置之度外)하지도 않는다. 가짜에 대한 욕망이 폭식이 아니라 영양식일 수도 있다는 믿음으로. 혹은 가짜가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소망으로. 그러니 피카소의 “나쁜 미술가는 베끼고, 좋은 미술가는 훔친다”는 말을 다음처럼 바꿔보자. “나쁜 가짜는 진짜를 베끼고, 좋은 가짜는 진짜를 훔친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