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3-06 21:53:14
기사수정 2017-04-11 15:25:09
‘법대로 하자.’
지난 주말 헌법재판소 인근인 안국역 사거리를 지나다 한 현수막에 눈길이 멈췄다. 서울대병원 방면으로 직진하려던 중 신호에 걸렸는데 그 단호한 메시지에 다른 풍경은 볼 겨를이 없었다. ‘헌법 제84조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 그래서 ‘탄핵 불가’란, 짧고도 강력한 메시지였다.
기가 찼지만 그 선전전에 감탄했다. 궤변이다 보니, 상대를 향한 설득이라기보다 같은 진영을 향하는 메시지로 읽혔다. 탄핵 인용은 법치의 부정이라 불복하겠다는 협박으로 다가왔다. ‘아스팔트에 피가 뿌려질 것’이란 대통령 대리인단의 선동이 떠올랐다.
염치를 알고 살기가 어려운 시절이다. 우리 사회는 드러난 잘못에도 곧잘 침묵하고 왜곡하고 편을 갈라 혼란을 조장한다. 저열하고 지엽적인 소재가 논란으로 비화해 본질을 가리는 일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이다. 지난달 등장한 ‘고영태 녹취록’ 역시 많은 이들에게 답답함을 안겼다. ‘빵 터져서 날아가면 다 우리 것’ 등 자극적인 인용과 함께 탄핵정국 막판 변수가 되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요란했다.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사례로는 2014년 12월 검찰의 ‘정윤회 문건’ 수사 건이 입길에 많이 오른다. 6일 박영수 특검팀이 90일간의 대장정 결과를 발표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이 빠졌다. 정윤회 문건 수사는 어떻게 됐느냐는 것이다. 검찰이 2014년 ‘비선실세의 국정농단 의혹’에 의지를 갖고 수사했더라면 오늘의 이 혼란은 없었을 것이란 지적이 정설이기 때문이다.
특검팀은 이 사건에 손을 대지 못했다. “저희도 특검법을 받고 의아했습니다.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특검 수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특검팀 관계자는 “법 제2조에 규정된 14개 항목 수사도 벅찬 형편”이라고 말했다. 물론 특검법 2조 15호는 1∼14호 사건과 ‘관련하여’ 인지된 사건의 경우 수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론적으론 ‘최순실 등 민간인’에 정윤회를 넣어 2014년 수사를 살펴볼 수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눈앞에 쌓인 14개 항목을 두고, 법원이 ‘관련하여’라고 인정할 연계고리를 찾아내 결국 검찰의 수사축소 의혹을 규명한다? 성과를 낙관하기 힘든 사안이다.
그런 탓에 특검팀은 법 15호의 ‘관련하여’를 삭제해 줄 것을 정치권에 끈질기게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검팀 관계자는 “특검법 협상 때부터 여당이 고집한 문구라 야당도 난색”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독소조항을 ‘알박기’해둔 셈이다. 애초 이 사안이 특검법에서 빠진 이유도 의문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대통령 탄핵소추를 위해 유력 정치세력이 검찰과 딜을 했다는 설이 흘러다닌다. 검찰특별수사본부가 탄핵소추에 충분한 공소장을 작성하는 대가로 검찰로 향할 수 있는 사안은 뺐다는 것이다.
이제 칼은 특검에서 다시 그 검찰로 넘어간다. 죽은 권력에 대한 수사는 가혹할 것이다. 그리고 2014년은 역사에 묻힐지도 모른다. 바쁜 삶 속에서 본질이 뭔지, 염치 없는 이들은 누군지 살피고 기억하느라 여간 힘든 시절이 아니다.
조현일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