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군의 사드 배치 결정 후 이루어진 중국의 보복성 경제 조치로 피해를 봤다는 신고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대중(對中) 무역대로 신고센터'에는 지난 17일 현재 60개사 67건(한 기업에서 2가지 이상 유형의 피해가 발생하면 중복 집계 기준)이 접수됐다.
◆'사드 보복' 피해 신고 급증
피해 사례로는 의도적 통관 지연이 23건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계약 보류와 파기 15건, 불매운동 14건, 대금결제 지연 4건 등이 뒤를 이었다.
무역협회 측은 "우리 기업의 피해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업계의 피해 상황을 모니터링하면서 실시간 상담과 기업 방문 컨설팅, 관련 기관 지원사업 연계 등을 통해 대응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중국의 '사드 보복'으로 국내 업체들의 피해가 큰 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이 너무 무기력한 게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업계의 정확한 피해 상황 집계에도 상당히 소극적인 데다, 중국에 강력한 항의조차 제대로 못하고 있다.
강대국으로 급부상한 중국과 외교 사안인 만큼 신중하게 다뤄야 할 문제라는 점은 차후로 치더라도 우리 정부가 조기대선 정국을 맞아 지나치게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빗발친다.
◆기재부 장관 "사드 보복,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없다"…발언 논란
실제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7일 '사드 보복' 문제에 대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다"고 잘라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당시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유 부총리가 "한한령(중국 내 한류 금지령)은 어딘가 실체는 있지만, 법적 실체는 없다"며 "법적 실체가 없는 것을 가지고 국가 간에 얘기할 수 없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중국의 보복 조치가 공식 문서가 아닌 구두나 문자 메시지 등 비공식적인 수단을 통해 이뤄진 만큼 정부의 대처가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드 배치가 지난해 7월 결정됐고, 중국 정부는 그동안 한국 제품의 통관 지연과 롯데의 현지 사업장에 대한 일제 소방·위생점검, 중국인 단체관광객의 20% 감소 지침 등 여러 보복성 조치를 취해왔음에도 우리 정부는 실효적인 대응은 물론이고 업계 피해 상황의 파악조차 뒤늦게 착수했다는 원성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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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올라온 현지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반대 시위의 모습. |
그 결과 중국 정부의 '사드 보복'이 악화일로로 치닫는 가운데, 현지 롯데마트 10곳 가운데 8곳이 문을 닫은 상태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18일 기준 소방시설 점검 등을 통해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롯데마트 중국 지점의 수는 63개다. 지난 8일 55개와 비교해 열흘 사이 8개 늘었다.
◆中 롯데마트 점포 79% 정상영업 못하고 있어
물론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점포의 증가 속도는 느려지고 있으나, 롯데마트 스스로 이런저런 이유로 문을 닫은 점포도 16개에 이른다.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른 영업정지에 자체 휴점까지 더하면 79개 점포가 현재 정상영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롯데마트 전체 중국 점포(99개)의 79%에 이른다.
상황이 이러자 일반 시민도 정부의 저자세를 비판하고 나섰다.
한 누리꾼은 정부의 늑장 대응을 지적하면서 "무슨 일이 터지면 빠르게 대처하는 법이 없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이도 "업체가 다 망하고 나면 그때 자금을 지원할 것이냐"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사드 보복' 피해업체에 4000억원 지원…언제?
'사드 보복' 파문이 갈수록 확산되자 정부는 뒤늦게나마 피해 업체들을 만나 4000억원 규모의 지원을 약속했다.
또 중국의 최근 조치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규약에 어긋나는지 검토키로 했다.
이달 들어 '사드 보복' 사태가 본격 불거진 뒤 정부가 개별 피해업체들로부터 직접 상황을 듣겠다고 나선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다.
‘보여주기’식이 아닌,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며 신속한 정부의 지원조치가 잇따라야 한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보여주기' 식 아닌 실질적이며 신속한 정부 지원조치 있어야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면세점, 여행·관광업체, 전자업체 등과 만나 중국 사업 관련 애로사항을 들은 것은 지난 15일의 일이다.
중국 매장의 대규모 영업정지 사태를 맞은 롯데마트와 중국인 관광객(유커) 매출 비중이 70~80%에 이르는 롯데·신라면세점과 주요 여행·관광업체, 중국에 진출했거나 수출 비중이 큰 전자제품 업체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업체들은 지금까지 확인된 '사드 보복' 피해 현황을 정부에 보고하고, 자체 대응 조치와 앞으로의 계획 등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최근 중국의 한국 기업 조사 증가, 통관과 검역 강화 등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중국 내 소비자들의 인식 악화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기업 애로사항 해소를 위해 적극 나서 줄 것을 요청했다. 비관세 장벽과 수입규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대응과 실제 피해가 있는 분야에 대한 지원도 촉구했다.
◆시민들 "무슨 일 터지면 정부가 빠르게 대처하는 거 못봤다"
주 장관은 이날 제기된 기업들의 애로사항에 대해 중국과 협의, 단계별로 맞춤형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피해기업에는 범정부 차원에서 4000여억원의 자금을 지원하며, 중소기업청의 긴급경영안정자금을 750억원에서 1250억원으로 확대하고, 문화체육관광부의 관광기금 운영자금도 700억원에서 120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금융위원회는 2000억원의 정책자금 지원을 통해 보호무역 피해기업과 관광업계 등을 도울 예정이다.
주 장관이 피해업체 지원을 약속했지만 지난달 말 롯데가 경북 성주골프장을 사드 부지로 제공한 직후 본격적으로 중국 당국과 소비자들의 보복이 시작된 지 보름이나 지나서야 겨우 업계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나선 것은 만시지탄이라는 비판을 산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지난 2일 중국 국가여유국이 자국 여행사에 한국 여행상품의 판매 금지 지시를 내린 뒤 중국인 관광객 감소 여부나 관광업계 피해 규모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는 게 문체부의 설명이지만, 중국을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경제부처 수장들이 당장 대립각을 세워 중국 정부를 몰아붙이는 것보다 물증을 모을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리는 게 낫지 않느냐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그러나 중국의 반한 여론은 도를 넘고 있다는 점으로 미뤄보면 '한가한 소리'라는 반론도 맞선다.
지난 14일에는 파워 블로거 여성인 왕훙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롯데 놈들이 고기 먹는 것만 좋아하고 주인의 감정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하 표현을 쏟아내면서 한국 화장품이나 롯데 상품의 구입을 거부하자고 선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현재 관련 게시물은 삭제됐다.
아울러 중국 내 롯데마트를 돌면서 식품을 훔쳐먹고 일부러 제품을 훼손하는 영상 100여개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기도 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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