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3-31 01:20:43
기사수정 2017-04-11 17:39:46
포퓰리즘이 연금운용 걸림돌 / 국민 노후자금 손실 불가피 / 사탕발림 공약 멈추지 않으면 / 국가 ‘쇠망의 길’ 걸을 수밖에
정치가 어떻게 나라를 망치는지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558조원의 연금을 굴리는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지방으로 옮겨진 과정을 되새겨보라. 때는 4년여 전 대선 무렵이었다.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전북 여론조사에서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게 뒤처졌다. 화끈한 한 방이 절실했다. 전북선대위 출범식에 나온 문 후보는 “국민연금공단과 함께 기금운용본부도 전주로 이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국민연금공단과는 달리 기금운용본부는 당초 이전 대상이 아니었다. 돈을 만지는 기관들은 금융기능이 밀집한 서울에 있어야 생산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논리는 ‘유권자 표심’이란 정치논리에 힘없이 무너졌다. 야당의 공약을 지켜본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떴다. 김무성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기금운영본부의 지방 이전을 아예 법제화하겠다고 밝혔다. 얼마 후 기금운용본부의 전주 이전을 명문화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새누리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 후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기금운용본부의 직원들은 지방 이전 계획에 따라 지난달 전주로 보따리를 쌌다. 하지만 투자를 담당하던 핵심 인력들은 줄사표를 내고 말았다. 금융 불모지인 지방으로 가느니 서울의 민간 금융회사로 이직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지방 이전은 투자전략 수립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기금운용본부 직원들은 매일 아침 민간 전문가에게서 시황 브리핑을 받고 투자계획을 짠다. 해외 투자자들과도 자주 머리를 맞대야 하지만 지방 이전 후엔 거의 단절된 상태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서울에 분소나 해외증권실 등을 두는 차선책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국익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저금리와 불황 속에서도 4.7%의 높은 수익률을 냈다. 해외증권투자 등에선 수익률이 10%를 넘었다. 이 같은 고수익은 이젠 기대를 접어야 할지 모른다. 기금운용본부의 전문성 약화가 수익률 저하로 이어질 게 자명한 까닭이다. 운용 수익률이 1%만 떨어져도 연금 수익은 5조원이 허공으로 날아간다. 정치 포퓰리즘이 국민의 노후자금까지 갉아먹는 형국이다.
어디 국민연금뿐이겠는가. 나라 곳간을 축내는 포퓰리즘 공약은 일일이 손으로 꼽기에 벅차다. 대선주자들은 정부와 기업 돈을 끌어 쓰는 정책을 앞다퉈 쏟아낸다. 대선 재수에 나선 더불어민주당의 문 경선후보는 203만명의 가계부채를 탕감해 주겠다고 공약했다. 이재명 후보는 이보다 더 많은 490만명을 신용 사면해 주겠다고 장담했다. 마치 누가 더 큰 보따리를 푸는지 내기를 하는 꼴이다. 안희정 후보는 10년 일한 직장인에게 1년간 유급휴가를 주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는 중소기업 취업자에 대기업 80% 수준의 임금을 보장하겠다고 큰소리쳤다. 한마디로 뜬구름 잡기식 공약이다.
서민들의 빚을 덜어주고 열심히 일한 국민에게 휴가를 보내주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한다. 무조건 빚을 탕감하면 정부 재정이 취약해지고 성실히 채무를 상환한 사람만 바보가 된다. 앞으로 누가 월급을 쪼개 은행 빚을 갚으려 하겠는가. 휴가나 급여를 늘리자는 공약도 마찬가지다. 기업 부담이 커지면 국내보다 해외로 눈을 돌리는 기업이 많아질 것이다. 일자리를 늘리기는커녕 오히려 줄이는 나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국가 정책은 선의만으로 되지 않는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있다. 달콤한 사탕은 결국 이를 썩게 만드는 법이다.
일찍이 공자는 무책임한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자 자공이 “요즘 정치하는 사람은 어떠냐”고 묻자 “한 말 두 되들이밖에 안 되는 좁은 소견의 사람을 헤아려 무엇하겠는가”라고 일갈했다. 우리 정치인들의 몹쓸 행태가 딱 그 짝이다. 2500년이 흘렀어도 한국의 ‘정치시계’는 고대 중국의 난세에 멈춰 서 있다. ‘한 말’은 고사하고 ‘한 되’도 안 되는 소견이 즐비하다. 성인도 탄식하는 그런 정치현실이 가슴 아프다.
배연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