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봄 사용설명서

시작, 설렘, 새로움의 계절
소중했던 것을 놓치기도 쉬워
기억한다면 헤어짐이 아니다
봄은 상춘객 영원한 추억창고
진달래꽃, 개나리꽃, 벚꽃…. 웬 꽃타령인가. 시국이 시국인 만큼 이런 꽃타령은 염치없어 보인다. 그래도 돈타령이나 신세타령보다는 꽃타령이 훨씬 생산적이라는 합리화를 해본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까지 보태면 하루쯤의 꽃타령은 면죄부도 얻을 듯하다. 이런 꽃타령을 봄이면 즐겨 찾게 되는 노래를 의미하는 신조어인 ‘봄 캐럴’로 바꿔 보면 어감이 더 산뜻해지기도 한다. ‘봄봄봄’, ‘벚꽃 엔딩’, ‘우연히 봄’ 등 경쾌한 봄 캐럴들을 듣고 있으면 속도 없이 그냥 좋다. 바야흐로 4월이니까.

그런데 의외로 젊은 층에서 공감하는 ‘봄이 좋냐’, ‘봄 사랑 벚꽃 말고’, ‘왜 또 봄이야’처럼 삐딱한 제목의 봄 캐럴들은 가사도 도발적이다. 봄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하기야 일찍이 이규보도 ‘춘망부(春望賦)’에서 여름은 더워서 짜증나고, 가을은 쓸쓸하며, 겨울은 봄에 비해 일방적인데, 오로지 봄만이 “화창해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며, 저절로 노래가 나오기도 하고 눈물이 흐르기도 하여 감정이 천 가지 만 가지로 변한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봄 안에 사계절을 모두 담을 수 있고, 춘심(春心)은 희로애락을 격하게 오가기에 문학 속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변화무쌍하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우선 봄이 봄인 이유는 시작이나 설렘, 새로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봄 다음에 겨울이 오는 것이 아니다.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 이런 순서가 곧 순리(順理)이다. 따뜻한 봄이 온 것은 추운 겨울을 견뎌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들었던 사람에게 봄은 더 절실하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꽃피는 나무이다.”(황지우, ‘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이 시의 생명력은 ‘저절로’ 찾아오는 봄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가는 봄의 활력에서 나온다. 자신의 온 몸으로 겨울을 밀어내야 꽃 피는 봄을 맞을 수 있다. 봄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물론 봄 속에도 복병은 있다. 누구에게나 봄이 연두 빛깔인 것은 아니다. 중년의 어느 봄날에 만나 중고(中古) 같은 연애를 하다가 재혼 부부가 된 소설 속 주인공들이 있다. 더 나아진다기보다는 덜 나빠지기를 바라는 소박함으로 그들이 함께 보낸 봄날은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했다. 그렇게 12년을 보낸 봄밤에 반신불수가 된 남편과 알코올 중독자가 된 아내는 상대방에 대한 마지막 배려 속에서 짠한 최후를 함께 맞는다. “그 봄밤이 시작이었고, 이 봄밤이 마지막일지 몰랐다.”(권여선, ‘봄밤’) 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소중했던 것을 놓치기도 쉬운 계절이다. 그렇게 꿈인 듯 생시인 듯 봄날은 간다.

그럼에도 봄은 또 다른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봄을 겪어본 사람이다. 그리고 기억은 과거가 그립고 현재는 아쉬울 때 극대화된다. 그래서 이전의 봄을 잊지 않았다면 헤어진 연인도 다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전과는 다르게 제대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헤어지더라도 봄이 올 때마다 또다시 만날 수 있다. “나는 너를 오래 만나기보다 오래 기억하길 원한다.”(윤대녕, ‘상춘곡’) 벚꽃이 필 때마다 찾아올 테지만 굳이 직접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다. 기억한다면 헤어진 것이 아니다. 봄은 이런 ‘상춘객(賞春客)’들의 영원한 기억의 저장고이다.

이처럼 봄은 단수(單數)가 아니라 복수(複數)로 존재한다. 역사 속에서도 아우슈비츠의 봄, 서울의 봄, 아랍의 봄 등 많은 봄이 있었지만 늘 새롭게 다시 찾아온다. “봄은 살아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기형도, ‘나리 나리 개나리’) 때문에 봄은 인생이나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매번 다르게 대답하라고 부추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봄의 ‘회복 탄력성’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2017년의 봄처럼 분노나 슬픔, 안타까움을 강하게 느낄 때는 더욱 그래야 한다. 그래서 봄이 봄인가 봄.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