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대선 매니페스토 2.0-미래와의 약속] “역사의 愚 되풀이 말고… 전 국민 힘 합쳐 혁신의 첫걸음을”

④ 개헌·정치혁신, 시민참여 상향식으로 - 임성호 경희대 교수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통령선거라는 특수상황은 비극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진정한 정치혁신을 촉발시키는 호기(好機)라는 점에서 국가를 위한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정말 이래선 안 된다는 인식을 퍼뜨리고 이번엔 꼭 변해야 한다는 염원을 되새기게 했다. 앞으로 하기에 따라 국가를 변모시킬 정치혁신의 중대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귀중한 기회는 우연히 오지 않았다. 세계 민주주의 발전사에 모범사례로 남을 만큼 국민이 성숙함을 보이며 직접 행동에 나서거나 압도적 사회담론을 형성시켜준 덕에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정치권이 아니라 국민이 엄청난 집합적 힘을 발휘해 정치혁신의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므로 향후 정치혁신을 이끌 주체는 당연히 국민이어야 한다. 정치권은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다.

만약 주객이 전도돼 정치권이 하향식으로 혁신을 주도하면 필패가 될 것이다. 정치권이 그동안 보인 모습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낸다. 비전 없는 권력을 위한 권력욕에 사로잡히고 경직된 정파 집단주의에 빠져 국민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 권력게임에 몰두해 왔다. 국민을 위한 대의명분에 따른 합리적 국정운영은 공허한 수사(修辭)에 그쳤다. 이러한 정치권이 정치혁신을 이끌겠다면 또다시 정파적 집단 대립과 교착이 심화될 것이고 어떤 전략적 동기가 작용하는지 국민의 의심만 살 것이다.

정치혁신의 성패는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가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정치권은 방식은 경시하고 방향에만 집중하고 있다. 특히 개헌이나 기타 제도 개선을 놓고 여러 정치인들이 상이한 방향을 제시하며 서로 반목하고 있다.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분권형 대통령제, 대통령 4년중임제 등 권력구조의 방향을 놓고 마찰을 빚고 있다. 개헌 사안이든 법률 개정 사안이든 간에 결선투표제 및 중대선거구제 도입, 비례대표제 확대 등 선거제도 개선방향을 놓고 의견 충돌을 한다. 이 정치인들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정치체제에 마치 단 하나의 정답이 있다고 믿는 듯 각자 주장에 집착한다.

특정 개혁방향을 고집하는 정치인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정치혁신은 그들이 아닌 국민이 주체가 돼 원동력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의 호기를 국민이 만들었듯이 앞으로의 혁신도 국민의 힘으로 추동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역할은 국민 사이에 광범한 사회담론이 형성되게 하고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데 머물러야지 스스로 답을 내 국민을 이끌려고 하는 데까지 가선 곤란하다. 즉, 정치권은 촉매역할을 맡아 학자, 언론인, 이익단체 활동가, 정책전문가, 나아가 일반시민이 각종 다양한 의견을 내게 하고 오랜 숙의를 거쳐 공감대가 조성될 수 있게 하는 장(場)을 제공해야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개헌과정은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인종차별적 성격을 없앤 새 헌법을 만들기 위해 1989년부터 1997년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수많은 단체와 일반시민의 온갖 다양한 의견을 받고 투명한 논의를 진행했다. 이러한 상향식 방식을 통해 상당한 공통분모를 찾은 후에 정치권이 최종안에 대한 합의를 할 수 있었다. 지난(至難)한 세월 동안 다방면의 시민참여를 통해 얻은 결실이었다.

참으로 많은 정치혁신의 과제가 우리 앞에 있다. 개헌이 필요한지, 권력구조는 물론 기본권, 경제조항, 지방자치, 선관위, 감사원 등과 관련해 어떤 개헌안이 어떤 장단점을 지니는지, 근본적인 국가정체성을 규정하는 헌법전문은 어떻게 바꿀지, 헌법 외적으로 어떤 제도변혁이 필요할지 등 매우 많은 측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난제는 정치권의 일부가 일방적으로 이끌어서 합의점을 찾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시민참여 과정을 통해 전 국민이 지속적으로 힘을 합할 때만 가능하다.

시민참여형 접근은 과정의 미를 중시한다. 특정 제도개혁을 반드시 정답으로 성취하겠다는 결과중심적 접근은 요즘처럼 사회이익이 파편화된 다양성의 시대에 자칫 갈등만 증폭시키고 성과를 내기 어렵다. 반면에 시민참여 과정은 실제 참여하거나 관심 있게 지켜보는 사회구성원에게 효능감을 느끼게 해주고 또한 체제 신뢰감을 갖게 해준다. 정치혁신에 꼭 필요한 요소는 특정 제도의 도입이기보다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가운데 효능감과 신뢰감을 느끼고 공적 시민의식을 쌓는 개방적 과정일 것이다. 설혹 특정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과정의 미는 건전한 민주사회의 안정적 운영에 도움이 된다.

1987년 개헌은 극소수 정치엘리트에 의해 졸속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내용상 문제가 많다고 비판받는다. 그런데 또다시 소수 정치인이 급하게 하향식 개혁을 추진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지고 역사의 우(愚)를 되풀이하는 셈이다. 이번엔 유기체가 진화하듯이 사회구성원이 가능한 한 많이 참여해 서서히 그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이루며 정치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미국 혁신주의 운동이 예시해 주듯이 진정한 혁신은 정치제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민의식이 성숙되는 가운데 사회생활 전반의 변화를 요구한다.

지금부터라도 대선주자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은 시민참여의 장을 어떻게 만들고 숙의과정을 어떻게 도울지 시민사회와 협의해 구체적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각 행위자는 이에 부응해 정치혁신의 주체의식을 갖고 적극성을 띠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 모두가 정치혁신, 나아가 국가혁신의 의미 있는 첫걸음을 함께 내딛어야 할 것이다.

특별기획취재팀=김용출·백소용·이우중·임국정 기자 kimgija@segye.com

◆임성호 교수는 

1982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았다. 시먼스칼리지 정치학 조교수(1993∼1995)를 거쳐 미국정치연구회 회장, 한국정당학회 회장 등을 맡아 활동한 뒤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차관급인 국회 입법조사처장을 역임했다. 현재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근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