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갤러리] 고요한 화폭에 생명 꿈틀… 예술은 가슴 뛰는 환희

키위 나무줄기와 잎을 그린 김보희
‘투워즈(Towards)’
동물의 왕국 TV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에 들어서면 초록의 바다에 빠져드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막 비가 스치고 지난 자리에 초록의 장관은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다양한 얼굴의 초록에 압도되게 마련이다. 아프리카에 초록의 표현이 20여 가지가 넘는 이유다.

김보희 작가도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제주에서 초록에 빠졌다. 어느 시점부터 제주에 작업실을 마련해 서울을 오가고 있을 정도다.

10여년 전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만난 가이드팀의 호칭이 ‘야생중독’이었던 점을 떠올리게 해준다. 작가는 제주에서 야생, 즉 자연을 진정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160×130㎝, 30일까지 학고재 갤러리)
작가는 여미지식물원에서조차도 원시정원을 만난다. 밀림이 연상되는 울창한 수풀 사이로 열매와 꽃이 보인다. 작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환상적 풍경을 만들고 있다. 씨앗(열매)과 꽃잎만이 확대돼 펼쳐진 화폭은 시각을 몰입케 하는 마력을 지녔다. 아마도 생명의 기운이 아닌가 싶다. 씨앗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아우라다. 생명의 존엄과 경외감을 그 어느 말보다 강력하게 웅변해 주고 있다.

제주 둘레길에서 만난 천남성 꽃도 화폭에 담았다. 독성이 있어 사약으로 쓰였던 식물이지만 꽃만큼은 아이로니컬하게 여성의 고혹적인 자태다. 키위 줄기와 이파리도 등장한다. 거기에 난 섬세한 털들이 키위 열매를 연상시킨다. 미래의 생명의 씨앗이 잉태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신비롭다.

이화여대에서 정년을 앞둔 작가는 이제야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수 있게 됐다고 털어놓는다. 전통 한국화인 초충도와 청과도가 생명의 씨앗으로 변주되고 있는 것이다. 고요하고 신비로운 화폭에서 생명의 설렘이 꿈틀거린다.

이순의 나이를 지나 마음가는 대로 하여도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법에서도 자유자재하다. 한국화의 채색기법을 사용하지만 캔버스 위에 아크릴이나 바니시 등 서양화 재료도 다양하게 수용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생생하면서 차분한 색채와 단아한 여백이 어우러진 풍경은 매우 명상적이라 하겠다. 바로 고즈넉한 산사에서 참선에 빠진 스님의 모습이 이런 것이 아닐까.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떨림이 전해진다.

예술은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