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4-16 19:52:53
기사수정 2017-04-16 19:52:53
‘열정페이 관행’에 신음하는 전문직 새내기 잔혹사
“머리만 닿으면 잠들죠….”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 외과 레지던트 2년차 A(33)씨는 피로를 풀 틈이 없다. 24시간 당직을 서고 나서도 환자연락, 외래진료 준비, 수술 준비 등의 업무로 잠시 눈 붙이기도, 씻기도 힘들 정도다. 주당 근무시간은 적어도 90시간 이상. 일이 익숙지 않을 때는 하루 3∼4시간도 자지 못했다. A씨는 “죽을 만큼 힘들어도 당연하다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세무사무소에서 실무수습 중인 B(여)씨는 지난달을 떠올리면 진저리가 난다. 일이 몰리는 ‘시즌’이어서 야근이 일상이었고 주말에도 출근해야 했다. 혹사에 가까운 일을 하고 받은 월급은 90만원. 시급으로 따지면 4000원 안팎으로 최저임금에도 못 미쳤다. 그는 “‘알바 시급’보다 못한 수준이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고 말했다.
전문직 새내기들의 ‘잔혹사’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업계에서 ‘저임금 중노동’을 통과의례쯤으로 여기는 탓에 ‘열정페이’가 관행처럼 굳어졌다. 20·30대가 대부분인 이들이 고민을 털어놓으면 “배가 불렀다” 등 차가운 반응만 돌아와 속앓이가 더욱 깊다.
직종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다. 살인적인 업무량, 저임금, 갑을 관계 등에 치인다. 근로기준법 위반도 비일비재하다.
16일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최근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66개 수련병원 전공의들의 주 평균근무시간은 88.9시간이었다. 가천대길병원(112.7시간), 가톨릭중앙의료원(105시간), 삼성서울병원(102.6시간) 등 100시간을 넘는 곳도 8곳이나 됐다. 주말당직비가 고작 2만원 안팎인 곳도 여럿이었다. 2015년 주당 80시간 이하 근무를 골자로 한 ‘전공의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바뀐 게 없다.
변호사 업계에서도 최근 비슷한 일이 논란이 됐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이 실무 수습을 할 변호사를 모집하면서 보수 없이 ‘실비 35만원’만 지급한다고 밝혀 비난이 일었다. 한국법조인협회 소속의 한 변호사는 “거칠게 말해 ‘수습은 후려쳐도 된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최저임금은 기본”이라고 꼬집었다.
세무사, 노무사, 회계사 등 일정 수습기간을 둔 직종들에서 비슷한 관행이 굳어 있다. 정식 근로자가 아닌 수습이란 이유로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주거나 아예 지급하지 않는 곳도 적지 않다. 일부 업계에서 일손이 달리는 즈음에 염가에 수습을 갖다 쓰는 것이 공공연한 일이 됐다.
고충을 토로해도 배부른 소리 한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이들은 더욱 서럽다. 세무사 자격 취득 후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손모(27·여)씨는 “힘들다고 말해도 ‘나중에 많이 벌지 않느냐’, ‘참으면 되지 않느냐’ 등 반응이 돌아오기 일쑤”라며 “대다수 전문직종이 부침을 겪어 미래가 딱히 밝은 것도 아닌데 그런 반응만 돌아오니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씁쓸해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는 전문직 새내기까지 포함하는 실습생, 수습생, 인턴 등 ‘일경험 수련생’ 고용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수련생은 1일 8시간, 주 40시간 이하만 근무하고 연장·휴일·야간 근무는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한국노무사회 이건우 제도개선위원장은 “전문직에서부터 만연한 ‘열정페이’ 관행은 고용문화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라며 “최소한의 임금을 지급하거나 교육생 신분에 맞지 않는 과도한 근무는 규제하는 등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창수 기자 wintero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