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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간드룩에서 보이는 마차푸차레와 마르디 히말>> |
비레탄티에서 탄 버스는 김체가 종착지였다. 결국 마르디 히말 트레일을 걷기로 확정했고, 간드룩에서 접근하기로 했다. 일정이 빠듯한 이들이라면 포카라에서 칸데까지 가서 바로 피탐 데우랄리로 올라 마르디 히말 트레일을 밟는 게 좋을 테다.
버스에서 내려 공사 중인 먼지 풀풀 나는 새 길을 벗어나 옛길인 돌길을 1시간 쯤 걷자 저기 간드룩으로 들어가는 환영문이 맞는다. 안나푸르나 산군 속에 깃든 마을들이 거개 그렇듯 간드룩도 계단에서 시작하고, 그 끝 솟은 언덕에 툭 불거지듯 로지가 꽤 많은 큰 마을이 앉았다. 무수한 돌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오르는 길로 야스민 삼데렐리 감독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도 깔리고 있었다.
간드룩 이르기 얼마쯤 전 네팔리 부부 두 쌍을 만났다. 카트만두의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두 남자와 그들의 아내였다.
“ABC 가시나?”
ABC 트레킹에서도 이 마을을 오거나 가니까.
“아니요, 여기서 자고 내일 내려가요.”
네팔에선 한국에서 일하다 왔거나 한국으로 가기 위해서,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말 몇 마디 구사하는 이를 어렵지 않게 만난다.
“유럽 사람이거나 미국인인 줄 알았어요.”
아무렴 외모가 그럴까. 영어 억양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한국인이라고 하자 당장 한국어로 몇 마디를 건넸다.
“제 아내는 구룽족이고 저는 체트리족이에요. 처가에 가면 제 말을 아무도 못 알아들어서 제 아내가 통역을 해요.”
언어가 스물이 넘고 방언이 백이 넘는 네팔이다. 네팔어가 공용어라지만 전체의 절반이 채 못 되는 사람들만 공유한단다. 따망족은 네팔 전체 인구의 3% 정도에 불과하지만 영국이며에 용병으로 이름이 높다. 구룽족의 민담 ‘죽음은 왜 보이지 않는가’를 읽은 적이 있다 하니 반가워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다.
“한 노인이 나무를 해서 지게를 지려던 순간 ‘죽음’을 만났는데...”
그때 로지의 주인이 차를 내왔다. 다른 부부는 호주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호주라면 네 살 아이랑 일 년을 머문 적이 있다. 호주에 대해 묻고 답하던 다담은 한국의 탄핵상황에 이르렀다.(한국은 헌재의 대통령탄핵심판을 기다리고 있었던 때) 한국의 정치 상황을 다소 부끄러워하며 그 전말을 전하자 그는 네팔 또한 안고 있는 여러 정치 문제와 사람들의 저항에 대해 들려주었다. 위로라면 위로이겠다.
정치에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정치로부터 결코 무관할 수 없으며,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우리 삶을 둘러싼 문제들에 대해 뜻을 표출해야 하고 주장해야한다는 데 서로 동의하며 일어섰다.
그들은 네팔인 친구의 안내를 받아 마을을 돌기로 했단다.
“가이드가 제 친구예요.”
“원래 아는 친구?”
“아니. 오는 길에 만나 친구가 됐죠. 네팔에선 몇 살 차이가 나도 다 친구예요.”
저녁을 먹기 전 그 가이드는 마을을 구석구석 소개해주었고 덕분에 구릉족 전통박물관에도 들었다. 우리 옛적 살림이 엿보여, 외모도 한국인과 비슷하단다, 즐거웠다. 네팔인과 같은 비용으로 입장하고, 방도 그렇게 구하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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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구룽족 전통박물관에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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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티베트 곰파(절). 나라를 잃고 떠나온 티베트인들에게 곰파는 큰 구심점이 되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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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간드룩의 로지 ‘사쿠라’, 마을에는 딱 한 그루의 벚꽃이 있었다. 파이며 직접 굽는 유일한 빵집이어 마을에서 머무는 여행객들이 이곳으로 조각 케익을 사러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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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간드룩에서 보이는 마차푸차레와 마르디 히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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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구룽족 전통박물관에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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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드룩의 로지 ‘사쿠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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