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안뜰] 전장 누비며 만주벌판 호령… 망국 설움 백성 끌어안아

〈40〉백성을 하늘로 섬긴 군주, 발해 무왕(武王) 발해 2대 무왕은 대조영의 뒤를 이어 나라의 기틀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임금이다. 발해의 역사를 전하는 중국사서인 ‘신당서’에서는 그가 왕위에 오른 719년부터 사망하는 737년까지 28년간의 업적으로 “평생을 전장을 누비면서, 나라의 땅을 크게 넓히니, 계루의 옛 땅 동모산을 둘러싸고 있던 동북 지역의 모든 오랑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인지 ‘무왕’이라고 하면 ‘전쟁’, ‘살육’ 등 살벌한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평생의 업적을 평가받은 시호가 ‘무왕’이었던 것과는 달리, 그의 국가운영의 비전을 담은 연호는 뜻밖에도 ‘백성을 어질고 평안케 한다’는 의미의 ‘인안(仁安)’이었다. 


발해 역사를 전하는 중국사서 ‘신당서’는 발해 2대 무왕의 업적으로 “평생 전장을 누비면서, 나라의 땅을 크게 넓히니, 계루의 옛 땅 동모산을 둘러싸고 있던 동북 지역의 모든 오랑캐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발해의 신하가 되었다”고 전한다. 사진은 발해의 건국지인 동모산 전경.
◆하늘의 믿음을 되찾아야

발해가 나라를 세운 지 30년이 훌쩍 지나도록 세계 제국이었던 당으로부터의 위협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나라의 안위는 계란을 쌓아놓은 듯 위태로웠다. 고구려 유민으로 척박한 땅에 세운 나라로 시작된 발해는 백성들의 희생과 헌신을 발판 삼아 국토도 넓어지고 살림살이도 나아졌으며 발해로 유입된 많은 이민족과도 한마음 한뜻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하지만 백성은 나라 잃고 떠돌아다니며 핍박받던 시절의 불안감으로 당에 대한 두려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위태로운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당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하고 그들을 조종하여 발해를 위협하자 무왕은 동생인 대문예(大門藝)에게 지시하여 공격을 서둘렀다. 그러나 대문예는 당을 자극하지 말라고 만류하면서 “고구려가 가장 번성했을 때 정예 병사가 30만명에 이르렀음에도 당의 한 차례 공격에 나라가 망해버렸는데, 고구려보다 몇 배나 작은 우리가 당과 척을 지면 발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패배의식으로 인한 공포감은 온 나라를 뒤덮었다. 게다가 백성이 의지했던 왕실에서조차 갈등을 봉합하고 민심을 달래는 데 앞장서기는커녕 위기감을 키웠다. 설상가상으로 무왕의 분노를 두려워한 대문예는 당으로 도망가 버렸다. 백성의 눈에 비친 왕실의 갈등과 분열, 그 자체만으로도 왕의 자리는 위태로웠다.

무왕은 같은 핏줄인 동생이라 해도 국론을 분열시키고 백성을 혼란에 빠지게 한 반역자 대문예를 용서할 수 없었다. 무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동생의 처벌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송환을 촉구했다. 그러나 당은 거짓말까지 일삼으며 대문예를 보호하고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라는 벼슬까지 주었다. 어떻게 보면 사실 동생 대문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당보다 나라의 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했고, 나라의 살림도 넉넉하지 못하였으며,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여전히 나라 잃은 두려움과 고통에서 치유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무왕은 그래서 더욱 물러설 수 없었다. 


발해왕국 초기 도성 구국(舊國)의 소재지 오동성 표지석 후면.
◆건곤일척(乾坤一擲), 자웅을 겨루다

발해의 기록을 보면 “무왕은 대장 장문휴에게 해군을 이끌고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등주)자사 위준을 죽였다”라는, 정말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전승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등주공격은 변방의 작은 나라 발해가 세계 제국 G1이었던 당의 해상 국제 관문인 등주(중국 산동성 봉래)를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당이 어떤 나라인가. 토번과 돌궐은 물론 백제, 고구려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린 세계 제국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막 껍질을 깨고 나온 발해가, 겁도 없이 당을 공격한 것이다. 군사력이나 경제력 어느 하나 비교할 수 없는 상대였지만, 무왕은 하늘과 같은 백성에게 어떻게 해서든 승전보를 전해야 했다. 다시는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살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등주공격을 위해 압록강부터 묘도열도를 지나 등주에 이르는 노선은 작전범위가 너무 길어 기밀을 유지하기도 어려웠고 변수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무왕의 계획은 작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망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무왕은 재위기간 내내 전쟁터를 누볐던 왕이다. 정확한 작전수행을 통해 단 한 번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힐 계획을 짰고 그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무왕은 등주를 지키던 당의 1000여명 군사는 물론, 등주자사(지방의 장관) 위준도 전사시켰다. 이후 전선을 산해관(山海關, 요동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동쪽 관문) 근처까지 확대시켰다. 당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공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당은 발해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하여 도망왔던 발해 무왕의 동생 대문예를 유주(현재의 북경)로 보내 맞서 싸우게 하는 한편, 신라가 발해의 남쪽 경계를 공략하게 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썼다. 그러나 발해는 당의 전통적 동맹국인 신라와 호시탐탐 발해를 노려 온 흑수말갈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무왕의 전술로 당은 아무것도 성공하지 못하고 패배의 쓴맛을 봤다.

등주공격의 승리로 발해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당과도 자웅을 겨룰 수 있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또한 무왕이 하늘처럼 섬기는 백성들에게 다시는 나라를 뺏기지 않고, 당에게도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 나라라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이후 당은 발해를 동북에 위치한 강대국으로 대하며 활발한 문화교류를 행하는 조치를 취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은 왕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서로 화합하여 탄생한 것이며 그것은 무왕이 백성을 섬기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그 무엇도 백성을 앞설 수 없으니

발해가 처음부터 당과의 전면전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무왕은 발해와 백성이 평화 속에서 지난날의 영광과 풍요로움을 누리길 바랐다. 이 공격에서 패배하면 나라는 순식간에 전란에 휩싸일 것이고, 또한 분열과 갈등으로 송두리째 쪼개지고 흩어져 또다시 망국민으로서 삶을 살게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나라는 작았지만 그들은 할아버지가 섬기던 하늘과 같은 백성이었고, 아버지가 되찾은 백성이었으며, 또한 무왕 자신이 섬겨야 할 백성이었다.

무왕의 아버지 대조영은 온갖 역경을 딛고 자신을 따라온 백성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늘처럼 섬겼다. 그래서 토벌 위협의 마수가 뻗지 않고 조상의 숨결이 살아있는 동모산 자락에 마을을 이루고 나라를 세웠다. 스스로를 지킬 군대도 만들었고, 나라의 동량들을 뽑아 당으로 유학 보내 선진문물을 배우게도 했다. 백성들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힘과 단합이 필요했다. 그래서 백성을 섬기는 마음으로 ‘인안’으로 건원했고, 온갖 위험을 마다하지 않으며 전장을 누볐다. 동분서주 전쟁터를 누비며 나라를 넓히고, 대국의 폭압에 주눅 들어있던 백성들을 어루만졌다. 지독한 망국병이었던 패배감을 떨쳐내고 발해의 주인으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힘썼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권력자들은 물론 왕실에서도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라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자신이 동생을 타이르지 못한 것도, 왕실을 다스리지 못한 것도, 더 나아가 백성을 불안에 떨게 했던 것도 모두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그 근본이 하늘이다’라는 간단한 진리를 잊었기 때문이다. 무왕은 고구려의 백성들이 왜 나라를 신뢰하지 않았고 어떻게 망했는지, 정든 고향에서 쫓겨나 낯선 이국땅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어떻게 감내해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후 유민과 말갈인이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뜻을 모아 당의 압박에서 벗어나 계루의 옛 땅으로 대장정에 올랐고, 최첨단 병장기와 잘 훈련된 막강한 당 군대의 추격의 공포를 극복하고 그들과 대적해 온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어떤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섬겨야 하는지를 온몸을 느끼고 깨닫게 했다. 그래서 더욱 백성의 희생 위에 세운 나라에서 백성을 하늘로 섬겨야 한다는 그 진리를 지켜나가야 했다.

물론 1300여년 전처럼 전쟁으로는 백성을 섬길 수는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 백성을 섬기기 위한 ‘전쟁’은 국민을 분열과 불안에서 구하고, 내외부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바로잡아야 할 상황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아닐까. 또다시 처음 자리에 선다.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