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나마스테!] “흐르는 강물처럼… 우리 삶도 스며들고 휘어져서 완성해야”

에세이집 펴낸 미황사 금강 스님 “물은 흘러가는 겁니다. 그 물이 흘러오면서 노루와 입을 맞추기도 했을 테고, 꽃밭 사이를 내려오기도 했을 겁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물은 계속 흐르고 흘러갑니다. 이 물이 다시 어느 풍경을 만나고 어떤 구비를 돌아갈지는 모릅니다. 새 풍경 속으로 물은 흘러갈 뿐입니다.”
물과 꽃의 본성을 담은 에세이집을 펴낸 미황사 금강 스님. 그는 “모든 사람에게는 본래 번뇌를 일으킬 필요가 없는 단순함의 적적(寂寂)이라는 코드가 있다”면서 “그 코드를 잊어버린 채 우리의 감각기관은 끝없이 비교하고, 분별하고, 욕심을 부리는 번뇌들로 가득하다”고 썼다.

새벽 예불을 올리는 종소리에 잠이 깼다. 사이를 두고 길게 울리는 법당종 소리는 잠든 뇌를 쥐고 가볍게 흔들며 정신을 일깨운다. 지난밤 금강 스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노루와 입을 맞춘다, 들을 때는 막연했는데 다시 떠올리니 이만한 구체적이고 시적인 묘사가 따로 있을까 싶었다. 노루가 흘러가는 물에 입술을 대고 목을 축이는 상황인데 입장을 달리하면 물이 입을 맞춘 셈이다. 어느 좋은 시절 그렇게 물은 노루와 입을 맞추기도 했을 테고, 꽃들이 만개한 길을 흘러내려올 때는 황홀하기도 했을 터이다.

지금 그 물은 어디를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금강은 다만 살아서 흘러갈 뿐이라고 했다. 과거도 공이요 미래도 공이라고 했다. 지금 바로 이 진공상태에 생명의 ‘묘용(妙用)’이 있다고 했고, 이러한 조건에서 죽을 힘을 다해 꽃은 피어난다고 했다. 그가 ‘만리청천 운기우래 공산무인 수류화개(萬里靑天 雲起雨來 空山無人 水流花開)’라는 송나라 황정견의 시를 각별히 좋아하는 배경이다.

에세이집 ‘물 흐르고 꽃은 피네’(불광출판사)를 펴낸 미황사 금강 스님을 만나러 해남 땅끝마을 달마산 아래로 갔다. 바람이 많이 불어 절 입구 오래된 나무들은 거세게 머리채를 흔들었지만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머리에 인 달마산 바위는 묵묵히 절집을 내려다보았다. 금강은 이날도 어김없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 아침 예불을 마치고 아랫마을에 죽순을 따는 울력을 다녀와서 미황사 괘불을 목포에 실어 보내고 동거차도 미역을 팔기 위해 붓글씨를 쓰다가 잠시 쉬는 중이었다. 늦은 오후에 도착해 성급하게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피로한 스님의 눈이 자꾸만 작아진다. 말씀을 저녁 예불 뒤로 미루고 조용히 선방을 나왔다.

“현대인은 늘 비교하는 버릇이 있어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고, 과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나를 봐요. 그러다가 지치는 거죠. 자기가 주인 되게 못 살아요. 자기가 주인 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의식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은 내가 주인이라는 거죠. 나라고 하는 존재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거든요. 연관성 속에서 내 삶은 내가 잘 가꾸자는 거죠.”

저녁 공양 후 대웅전 옆 ‘염화실’로 걸어가며 다시 듣기 시작한 금강의 말씀. 1982년 17살 때 해남 대흥사에서 출가해 중앙승가대 총학생회장과 승가대신문 편집장, 전국불교운동연합 부의장, 범종단개혁추진회 공동대표, 달라이라마 방한추진위원장, 미황사 주지 등으로 이어지는 삶을 살아온 스님이다. 그는 백양사에서 노스님 서옹의 뜻을 받들어 IMF때 자살 위기까지 가던 대중에게 선체험과 수행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래, 미황사에서 2005년부터 7박8일 수행하는 ‘참사람의 향기’를 지난 2월까지 100회 진행하면서 2000여명과 1대1 면담을 했다. 이들을 만나본 결과 공통적인 고민은 바로 남과 비교함으로써 생긴 번민이었다고 했다.

“아침에 난 참 행복하다, 그래요. 이런 나를 보호해 주는 이런 집이나 방에서, 이렇게 눈을 뜰 수 있으니까. 봄이 되면, 아주 날씨가 좋고 평화롭다가도, 돌풍이 불 때가 있어요. 바람이 불고 비 오기 전날 스님 한 분과 같이 이 방에서 자다가 밤에 한시쯤 일어났어요. 갑자기 걱정이 든 게, 바람이 얼마나 센지 밤새 나무가 흔들리는 거예요. 우는 거죠, 산이 우는 소리가 들려요. 산에 사는 사람들은 봄에 새들이, 철새들이 날아오는 게 느껴져요. 그 새들이 짝짓기하는 목소리도 들리고, 부지런히 집 짓고 알 낳는 것, 이게 이제 느껴지죠. 새들이 걱정된다고 했더니 옆자리 스님이, 산에 오래 살더니 달마산이 다 식구구만, 그러더군요.”

행복은 그렇게 가까이 있지만 슬픔도 멀리 있지 않은 게 ‘수류화개(水流花開)’의 삶이다. 금강은 단기출가체험을 비롯한 재가자 수행도량으로 미황사를 온전히 만들기 위해 2014년 정초부터 3년간 바깥 출입을 금하고 수행결사하려고 했다. 그의 발심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미황사 응진전에서 다도해를 굽어보면 멀리 왼쪽으로 동거차도가 보인다. 그날 유난히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는데 밤이 되니 그 바다에서 유난히 밝은 별이 솟아올랐다. 세월호 참사현장 조명탄이었다. 금강은 수학여행 떠난 아이들이 저 아래 어둠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데 내가 왜 여기 있나, 싶었다고 했다.

그는 그 길로 1000명분 떡을 해서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전국 사찰 스님들에게 문자를 보내 텐트 법당을 차렸다. 잠수사들에게도 먹을 것과 위로를 보냈다. 최종 인양 결정이 날 때까지 뒷전에서 보살피는 반장 역할을 했다. 조용히 거들었다. 동거차도에서 인양을 감시하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주민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미역 채취를 돕다가 미황사에도 미역을 보내왔다. 금강은 올해도 ‘미황사 돌미역’이라는 붓글씨를 일일이 300여장에 써서 비닐포장에 끼워 넣는 울력을 했다.

“지금 나라고 하는 건 실체가 없어요. 사람들은 나라는 걸, 내것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끝없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갈등하고 알아 달라고 몸짓을 합니다. 변화하는 내가 있을 뿐, 변함없이 늘 존재하는 독립된 나라는 건 없어요. 이 가짜 나를 내려놓아야 진짜 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나에 집착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지금 현재 생생한 나를 만날 수 있어요.”

염화실에 간간이 목탁과 염불소리가 끼어들었다. 밤 소쩍새도 울었고 바람 소리는 거셌다. 고등학교에 들어가 절친들이 도시로 떠나자 술 마시고 방황도 한 금강, 그는 우연히 혜능 스님의 ‘육조단경’에 나오는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만겁의 시간이 지나도 만나기 어렵다’는 글귀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백천만겁 만에 태어난 귀하고 귀한 사람의 삶, 이 삶이야말로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사람들은 늘 목표를 정해두고, 틀어지면, 좌절하고 포기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도 해요. 실제론 강물이 사과밭으로 갈 수도 있고, 논으로 갈 수도 있고, 동물 입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는데, 그렇게 다양한데….”

흐르는 강물은 바다를 꿈꾸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 어디로 흘러든다고 해도 스미고 휘어져서 삶을 완성하듯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금강은 이번 에세이집에 굵은 글씨로 음각해 넣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부도전까지 산책을 다녀온 후 작별인사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초파일을 앞두고 그는 다시 ‘동거차도 돌미역’을 쓰는 중이었고, 바람은 여전히 그칠 줄 몰랐다.

해남(미황사)=글·사진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