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5-21 19:14:36
기사수정 2017-05-22 19:26:59
빈곤·가정불화 시달리다… 가족 가치 부각에 우울감 커져
지난 20년간 웬만한 중소도시 인구보다 많은 22만257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가 차원에서 자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의 대응은 안이했다. 이에 세계일보는 대한민국이 ‘12년 연속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 ‘자살 공화국’ 등의 오명을 벗지 못한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봤다. 특히 ‘가정의 달’인 5월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 수가 가장 많은 점에 주목해 ‘벼랑 끝에 선 사람들’ 시리즈를 5회 연재한다.
22만2578명. 지난 20년(1996∼2015년) 동안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 수다. 웬만한 중소도시의 인구보다 많다. ‘슬픔’의 심각성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수치를 분석하면 도드라지는 게 있다. 대개 5월을 정점으로 한 봄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 수가 가장 많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일까.
A(51)씨 사례에서 힌트를 엿볼 수 있다.
A씨는 2013년 8월 일하던 공장에서 사고를 당했다. 몇 달간 입원했고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지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렸다. ‘불행하다’는 생각이 수시로 엄습했고, 사람들을 피했다. 몸도 성치 않아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죽고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다 2014년 5월 생을 마감하려 했다. 그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것 같았다”며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고 털어놨다.
경제적 빈곤 등에 따른 가정불화나 가족해체로 삶의 의욕을 잃고 극단적인 선택을 고려하거나 시도하는 사람이 줄지 않고 있다. 특히 가정과 가족의 가치가 한껏 부각되는 5월에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실효성 있는 자살예방 대책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 원인을 진단하고 치유할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슬픈 5월… 무엇이 등을 떠미는가
21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전문가들과 함께 통계를 분석한 결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 수는 대체적으로 ‘겨울철 급감→ 3월 반등→5월(혹은 4월) 정점 이후 감소’ 패턴을 보였다.
연령대별로는 10대와 50대를 제외한 나머지 연령대에서 5월 극단적인 선택자가 가장 많았다. 지난 20년간 5월 자살자 수는 모두 2만1607명으로 월평균(1만8548명)에 비해 3000명 정도 많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1월(1만4982명), 12월(1만5062명), 2월(1만6115명)보다는 무려 30%가량 많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선택에 구조적·환경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따뜻한 봄날씨와 함께 5월에 각종 가족행사가 이어지면서 소외계층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도 커지는 것을 요인으로 꼽았다. 대부분 사람이 추위 탓에 움츠러드는 겨울과 달리 봄철 들어 활동성이 활발해지면서 ‘자살사고’(suicidal ideation)가 강한 이들의 우울감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경희대 백종우 교수(정신건강의학)는 “일조량이 늘어나면 일반적으로 호르몬 분비로 긍정적인 기분이 드는데, 우울증 환자는 반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며 “대인관계가 늘어나는 등 타인의 활기찬 모습에 박탈감이 더 커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소외계층을 위한 정부 및 민간의 관심과 지원이 혹한기와 혹서기에 주로 몰리면서 봄철에 ‘복지 관심망’이 헐거워지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보건복지부는 겨울철 지원에 주력하고 있고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들은 동절기와 하절기에 복지사각 전수조사를 시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환절기 우울증’ 등 급격한 기온 변화에 따른 정신건강 악화도 요인으로 꼽힌다. 중앙자살예방센터 홍창형 센터장은 “‘봄탄다’는 표현처럼 겨울이 끝나는 시기가 우울증 취약 기간인데, 우울감은 자살사고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조사에 따르면 2015~2016년 3~4월의 우울증 환자는 1~2월에 비해 약 23만명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때 생리적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방치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극단적인 선택률 ‘견인’하는 노인들
특히 노년층에서 이 같은 경향이 뚜렷하다. 60세 이상 노인들의 ‘선택’에 미치는 구조적, 환경적인 요인의 영향이 더욱 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노인 자살을 이른바 ‘한국형 자살’이라고 분석했다.
가난에 시달리며 자식들의 부양을 받아야 하는 것을 ‘민폐’라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아시아인권위원회는 한국의 상황을 우려하며 “자식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전통적 가치관이 이유”라고 지적한 바 있다.
무엇보다 노인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다른 연령대와 달리 상승하고 있다는 점은 특히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2015년 60대 자살은 전년대비 4.6%, 70대는 10.2%, 80대 이상은 15.7% 증가했다. 10만명당 자살자 수 역시 10대(4.2명), 20대(16.4명), 30대(25.1명)에 비해 60대(36.9명), 70대(62.5명), 80대 이상(83.7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비정상적으로 많다. 65세 이상의 10만명당 자살자 수는 터키 3.8명, 영국 6.8명, 미국 16.6명, 일본 25.8명 등으로 우리나라의 58.6명과 큰 차이를 보인다. 노인들이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견인하고 있는 셈이다.
숭실대 허준수 교수(노인복지)는 “자식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심리와 배우자 사망 등으로 인한 고립, 일자리가 없어 사회구성원으로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상황 등이 심각해지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한국자살예방협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 노인만을 위한 정신건강센터가 수원에 1곳뿐이다. 이같은 환경에서 (노인자살 문제의) 개선이 가능하겠느냐”고 꼬집었다.
사회부 경찰팀=강구열·박현준·남정훈·박진영·김범수·이창수·배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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