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5-23 18:41:55
기사수정 2017-05-23 23:28:17
‘592억 뇌물 혐의’ 첫 재판 스케치 / 사복 차림에 ‘수감번호 503’ 달고 입장/ 구치소서 산 390원 핀으로 머리 정리/ 무덤덤한 표정으로 줄곧 정면만 응시/ 崔, 혐의 적극 부인하며 울분 토해/“朴 대통령 재판정에 세운 제가 죄인”
“피고인 직업은 무엇입니까.”(재판장) “무직입니다.”(박근혜 전 대통령)
‘피고인 박근혜’는 수척해 보였지만 차분했다. 23일 오전 10시쯤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박근혜(65) 전 대통령이 들어섰다. 삼성 등 대기업으로부터 592억원대의 뇌물을 받거나 받기로 한 혐의 등으로 지난 3월 서울구치소에 구속수감된 지 53일 만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전 법정 옆 구속피고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 전 대통령은 ‘피고인들은 나와서 자리에 앉으라’는 재판장의 말이 떨어지자 대기실에서 나와 천천히 법정으로 걸어들어왔다. 법정에 미리 도착해 있던 박 전 대통령의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가 변호인석에 앉아 있다가 달려나가 박 전 대통령을 피고인석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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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등 대기업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최초 여성 대통령’에서 ‘최초 탄핵 대통령’에 이어 ‘피고인’으로 신분이 추락했지만 이른바 ‘전투복’을 연상하게 하는 남색 재킷과 ‘올림머리’스타일은 여전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는 법정 출석 시 수의 대신 사복을 입을 수 있다. 다만 재킷 왼쪽 가슴에 달린 수감번호 ‘503’번과 화장기 없는 초췌한 얼굴, 다소 거칠게 틀어올린 약식 올림머리가 급전직하한 처지를 가늠케 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날 뒷머리를 큰 집게핀으로 고정하고 검은색 ‘똑딱핀’ 2개를 머리 양 옆에 꽂아 잔머리를 정리했다. 구치소 내에 금속으로 만든 머리핀 등은 반입이 금지돼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영치금으로 구치소 내에서 판매하는 집게핀(1660원)과 머리핀(390원)을 구입해 머리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착잡한 표정으로 피고인석에 앉은 박 전 대통령은 ‘40년 지기’ 최순실(61)씨가 뒤이어 들어올 때도 줄곧 앞만 응시했다. 그는 최씨의 변호인 이경재 변호사를 사이에 두고 최씨와 나란히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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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판에 비선실세 최순실 씨가 출석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
이어 피고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인정신문’ 절차가 진행됐다. 직업과 주소, 생년월일을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박 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직입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입니다”라고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답했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이원석·한웅재 부장검사가 번갈아 주요 공소사실을 열거할 때에는 양손을 팔걸이에 얹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거나 고개를 숙였다. 종이컵에 담긴 물을 한두 차례 마시기도 했다. 내내 어두운 표정이었던 박 전 대통령은 유 변호사가 “(‘블랙리스트’ 기소는) 살인자 어머니에게 죄를 묻는 것과 같다”, “검찰이 구체적인 범행 과정 등에 대한 설명이 없다” 등 무죄를 주장하자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찰 쪽을 쳐다봤다. 이어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변호인 입장과 같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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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기다리는 朴·崔 뇌물수수 혐의 공범으로 기소된 박근혜 전 대통령(앞줄 왼쪽)과 최순실씨(〃 오른쪽)가 23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의 피고인석에 나란히 앉아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약 3시간의 재판 내내 서로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가운데는 최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 사진공동취재단 |
반면 최씨는 격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울먹이는 모습을 보여 박 전 대통령과 대조를 이뤘다. 그동안 주로 자신의 재판에 수의를 입고 출석했던 최씨는 이날 베이지색 외투를 걸친 사복 차림이었다. 최씨는 “40여년 지켜본 대통령님을 재판정에 나오게 한 제가 죄인”이라고 흐느꼈다. 이어 “박 전 대통령이 뇌물이나 이런 범죄를 했다고 보지 않는다. 검찰이 몰고 가고 있다”며 “이 재판이 정말 진정으로 박 전 대통령의 허물을 벗겨주고, 나라를 위해 살아온 대통령으로 남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울분을 토했다.
이날 박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을 방청하러 법원을 찾아온 동생 근령씨는 “(언니의) 민낯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심경을 밝혔다. 박씨는 “흉악범도 아니고 중죄인도 아닌데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머리라도 하실 수 있도록 허락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남편인 신동욱 공화당 총재와 함께 법원에 왔지만 방청권이 없어 법정엔 들어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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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첫 재판이 열린 23일 서울중앙지법에서 박 전 대통령 동생 박근령(오른쪽)씨가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
박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 증인으로 출석해 “(박 전 대통령은) 나라사랑이 투철하신 분”이라고 주장했던 김규현 전 외교안보수석과 배성례 전 홍보수석, 허원제 전 정무수석 등은 피고인 측 관계자 자격으로 법정에서 재판을 지켜봤다. 박 전 대통령은 이들에게 따로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