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해가 지다 말고 얼굴에 왔다. 늘어선 가게의 한 집에 말을 넣는다.
“아스탐으로 가려는데...”
버스를 타고 마즈바틱에서 내리란다. 10분이면 갈 거라고.
“그런데, 거기도 호텔이 있어요?”
없단다. 포카라로 아예 나가서 괜찮은 숙소에서 자고 들어와 아스탐을 가란다, 시간도 늦었으니.
“민박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어쨌든 마즈바틱으로부터도 아주 많은 계단을 가파르게 적어도 1시간은 넘게 올라야 아스탐에 이를 거라고. 다음 일은 다음 걸음에!
“일단 마즈바틱까지 가보구요. 근데, 어떤 버스를 타야 하나요?”
지역 사람들도 그 버스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지. 그냥 지나쳐버린 버스 뒤에서 낭패스런 표정을 짓자 얘기 나눴던, 식당에서 일하던 젊은 친구가 나와 버스를 세워주었다. 다행히 버스가 잦았다. 올라타자 사람이 꽉 찼다, 어딘가에서 하루치의 수고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임직 한. 애쓰지 않은 삶이 어딨을까, 모든 산 것들이 그러하듯. 그대도 나도 욕봤다!
그럴 때가 있다. 간절하게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곳에서 기다리는 것 같은. 아스탐이 그랬다. 저녁이 내리는 이국의 산마을에서 굳이 산길을 더 걷겠다는 건 정녕 왜일까. 사물에만 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에만 그런 것도 아닌.
마즈바틱에 내리니 이미 6시를 넘는 시간, 산 아니어도 어두워오고 있었다. 홈스테이를 한다는 간판들이 있다. 자려고 들면 묵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보자!
넘의 동네, 그것도 넘의 나라에서, 심지어 산이라니. 산에서 얼어 죽지는 않을 것 같은 날씨를 믿고, 곳곳에 사람이 깃들여 사는 네팔 산을 좀 알게도 된 게다. 가끔 야간산행도 한 일이 있었던 경험과 산에 익숙한 삶이라는 배짱도.
거친 상황에 놓여보면 거개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마주한다. 때로 아주 작은 순간에도 목숨을 거는 무모함, 나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다; I can't go on. I'll go on(계속 갈 수가 없어. 하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사뮈엘 베게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에서)
다시 수없는 계단을 오르는 사이 아주 어둑해져서, 가슴에 켠 불로도 더는 발 디디딜 곳을 가늠치 못할 때야 배낭을 내려 헤드랜턴을 켜려할 때, 저만치 불빛 보였다.
“길을 잃으셨네.”
또 길을 잃었던 거다. 어디서였을까?
아스탐까지 4,50분은 걸어가야 한단다. 아, 어쩌자고, 어쩌라고....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살펴봐, 네비를!”
아이 어릴 적, 학교를 다니지 않고 산마을에서 9학년 나이까지 어미 곁에 늘 따라 다녔던, 아이로부터 또박또박 듣는 잔소리 내지 격려 내지 조언은 자주 그러했다. 주로 길 위였고, 운전 중이었고, 내비게이션도 부지런히 떠들고 있는데, 나는 버젓이 내비가 알려주는 데도 그 길을 잘못 가기 일쑤. 도무지 그게 귀에 혹은 눈에 들어오지가 않는 거다. 그러면, 주로 여자들이 운전하면 그렇긴 하지요, 하고 더러 얘기를 하는데, 그게 꼭 운전에만 그런 게 아니라 무슨 기계류들 앞에서 다 그 모양이다. 뒤에 앉은 아이가 잠시 한눈 판 사이 갈림길이 나오고 어쩔 줄 몰라 하면(이 아이가 내겐 내비게이션이었던) 아이는 찬찬히 힘주며 뒤에서 그리 말하는 거였다, 정말 무어라고 써야할지 모르겠는 까마득한 시험문제처럼 그만 머리가 하얘지는 걸 알고.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살펴봐얄 것이 어디 내비이기만 할까...
이제 어떡하나...
(계속)
옥영경(자유학교 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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