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지 이제 한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렇듯 중요한 대북 관계 정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통일부 장관 회고록 ‘피스 메이커’).
2000년 6월 제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기 넉 달 전인 2월 당시 임동원 국가정보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서 북한이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을 통해 남북정상회담 의사를 타진해왔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뒤의 느낌을 이렇게 회고했다. 대통령 면담 이후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만난 임 전 원장은 이 회장에게서 박 장관이 현대에 정상회담 주선을 요청했고, 이 회장은 박 장관 요청에 따라 요시다 다케시(吉田猛)라는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계 재일동포를 통해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본격 추진하게 된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남북관계에서 공식 채널보다 비선(秘線)이 결정적 역할을 한 대표적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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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교류 물꼬 트나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대북 민간단체 활동이 기지개를 켜는 가운데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그가 2005년부터 이끌어온 사단법인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의 행보가 주목되고 있다. 사진은 문재인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대북 접촉 승인을 받은 대북 인도지원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관계자들이 24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대북 지원 물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
남북 당국 간 대화가 중단되다시피 한 박근혜정부 시절에도 경문협은 간헐적으로 중국과 개성에서 북한과의 접촉을 이어갔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 2014년 3월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같은 해 8월 개성, 2015년 4월 개성, 2015년 3월 중국 선양, 같은 해 11·12월 개성에서 북측과 접촉했다. 2014년 12월 북한 유소년축구단 환영만찬에도 참석하는 등 경문협은 민간 남북교류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 모두 임 실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시기 이뤄진 일이다. 임 실장은 2005년 8월부터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호 인사인 비서실장 발표로 사임하기까지 경문협 이사장을 맡았다. 이재상 경문협 사무처장은 “임 실장은 비서실장에 임명된 5월10일 사임서를 제출했다”며 “서류상으로는 아직 이사장이지만 30일 이사회를 개최해 신임 이사장을 선임할 계획이고, 새 이사장 등기를 마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현재 청와대에는 임 실장과 경문협을 고리로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 하나 둘 합류하는 모양새다. 후보 시절 문 대통령의 메시지를 담당했던 신동호 연설비서관도 경문협 출신 인사다. 임 실장과 같은 한양대(국문과) 출신으로 전대협 문화국장을 지낸 신 비서관은 경문협 사무총장과 상임이사를 맡았다. 외교부 장관에 이어 통일부 장관 후보로도 거론되는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의원이 인천시장이던 시절에는 인천시 남북관계 특별보좌관을 했다. 경문협 임원 시절 북측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측과 접촉해 실무를 협의한 경험이 있고, 2013년에는 경문협의 지원을 받아 ‘분단아 고맙다’라는 산문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문 대통령의 러시아 특사를 한 송 의원과 함께 통일부 장관 하마평에 오르는 우상호, 홍익표 의원도 경문협 임원을 지냈다. 송, 우 의원은 부이사장, 홍 의원은 이사를 지냈다. 이 사무처장은 “국회의원의 겸임 금지 제한 규정이 제정된 이후 정치인 임원은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했다.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경문협 활동이 활발해질 것으로 보이지만 해당 단체는 조심스러운 태도다. 이 사무처장은 “지난 9년간 경문협 활동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고 새 정부 출범 이후 오히려 정부 지원을 받거나 대북 접촉 활동을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김민서 기자 spice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