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시대를 잘못 타고난 거인, 최후의 흔적을 좇아

선조시대 ‘기축옥사’ 주인공… 모반의 누명을 쓰고 비참한 최후/암굴 활용한 누각 마령면 수선루… 옛 선비의 곧은 절개 상징하듯
차를 몰고 진안을 찾는다면 부귀면 메타세쿼이아 길을 추천한다. ‘S’자로 굽은 길에 서 있는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이루는 풍경이 드라이브 코스로는 제격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예부터 위정자들이 말하는 ‘순리’에 벗어난 자들은 배척당했다. 위정자들이 말하는 순리가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치 않았다. 자신들의 세력이 힘을 키울 기회라면 상대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했다.

응징의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시대 무오, 갑자, 기묘, 을사 등 4대 사화다. 4대 사화의 희생자는 500여명에 이른다. 하지만 이보다 더한 참상이 벌어진 사건이 1589년(선조 22년)부터 3년간 이어진 ‘기축옥사(己丑獄死)’다. 4대 사화보다 배가 많은 1000여명이 희생당했다. 기축옥사의 중심에 선 인물이 율곡 이이도 칭찬해 마지 않을 정도로 당대의 천재라 불렸던 정여립이다. 기축옥사는 정여립 모반사건으로도 불린다.

정여립은 이이의 문인으로 서인 출신이었지만, 이이가 죽은 후 그는 동인으로 갈아탔고, 당시 왕인 선조의 눈 밖에 나게 됐다. 결국 관직을 떠난 그는 고향(전북 완주) 인근인 전북 진안으로 내려왔다. 관직을 떠났지만 학문적 소양이 깊고, 언변이 뛰어나며, 무예와 병법에도 능했던 그는 지역에서 명망이 높아졌다.

정여립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은 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정여립은 조정에 모반을 계획한다는 장계가 올라온 뒤 관군이 들이닥치자 자결해 죽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진안 천반산은 정상 부근에 넓은 벌이 형성돼 있고, 우물이 있어 정여립이 이곳에서 대동계 군사 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금강이 감싸고 흐르는 죽도는 육지 속 섬으로 불린다. 병풍바위가 죽도를 다른 지역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지만, 농업용수를 끌어쓰기 위해 바위를 폭파하면서 바위가 절개된 지점으로 물길이 생겨 진짜 섬이 됐다.

산이 많은 진안에서도 그는 산골짜기인 천반산 인근 죽도(竹島)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죽도에 서실을 지은 뒤,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해 그를 따르는 이들과 활쏘기 모임 등을 열었고, 점차 조직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진안에 머물던 정여립은 전주부윤의 요청으로 대동계를 이끌고 배를 타고 노략질을 하러 온 왜적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그 이후 조정에 날아든 한 장의 문서가 조선 최대의 정치 참극인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정여립이 전라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올라온 것이다. 황해감사의 장계는 어떠한 경위로 첩보를 취득했는가에 대한 이렇다 할 설명이 빠져 있는 지금으로 보면 ‘지라시’ 수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정여립을 잡기 위해 진안으로 금부도사를 보냈고, 정여립은 죽도에서 자결을 선택한다.

이는 서인에게 당시 득세하던 동인의 힘을 약화시키고, 권력을 잡는 기회가 됐다. 서인을 이끌던 송강 정철은 정여립이 죽었지만, 역모에 참가한 인물 색출에 나섰고 정여립과 조금만 관련 있는 자들은 거의 죽음을 맞았다.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은 정여립의 집에서 그의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죄목으로, 우의정 정언신도 정여립과 9촌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 묘향산에 머물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진안 백운면 영모정은 효자 신의연을 기리는 정자로 팔작지붕 위에 돌 너와를 사용한 점이 색다르다.
진안 천반산과 죽도를 감싸고 흐르는 금강은 용담면에 이르러서야 강의 형태를 갖춘다. 용담댐이 물길을 막아 호수를 이루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용담호의 모습은 마치 승천하는 용의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 등 당시 상황에서 용납하기 힘든 혁신적인 사상을 품었던 인물이다. 그가 사람을 모아 군사훈련 등을 했지만, 실제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증거는 딱히 없었던 상황이다. 그의 사상은 이후 전북에서 발발한 동학농민운동까지 영향을 미쳤다. 300여년이 지난 후 단재 신채호는 정여립을 가리켜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혁명적인 사상가로 평가하였다. 시대가 품지 못한 인물인지, 시대를 역행한 인물인지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단순히 권력의 희생양으로만 치부하기엔 아쉬움이 남는 인물이다.

지금이야 길이 잘 닦여 있지만, 불과 30여년 전만 해도 접근하기가 힘든 곳이었다. 금강 상류가 흐르는 진안 가막리의 천반산은 정상 부근에 넓은 벌이 형성돼 있고, 우물이 있어 정여립이 이곳에서 대동계 군사 훈련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천반산 줄기를 감아 도는 금강 건너편으로 죽도가 있다. 산대나무가 많고 섬 앞에 천반산이 죽순처럼 솟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육지 속 섬으로 불리는 것은 금강이 죽도를 감싸고 흐르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에는 병풍바위가 죽도를 다른 지역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지만, 농업용수를 끌어쓰기 위해 바위를 폭파하면서 바위가 절개된 지점으로 물길이 생겨 진짜 섬이 됐다. 비가 많이 올 땐 절개된 곳으로 금강 물줄기가 흘러 죽도를 섬으로 만든다. 정여립이 마지막까지 머문 곳이지만, 관련 유적은 남아 있지 않다.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 넘었다는 뜀바위, 대동계원과 훈련을 했다는 송판서굴 등만이 흔적으로 전해질 뿐이다.

전북 진안 마령면 수선루는 자연 상태의 암굴을 활용해 지은 2층 누각이다.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이 높은 연안 송씨 4형제가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바위 동굴을 활용해 지은 누각이기에 안에 들어가면 굴 속에 있는 듯하다.
진안 백운면 영모정은 효자 신의연을 기리는 정자로 팔작지붕 위에 돌 너와를 사용한 점이 색다르다.
진안은 북부는 산이 많고, 그나마 평야지대가 남부지역에 있다. 양반가들이 주로 있던 곳이 진안 남부 백운면과 마령면, 성수면으로, 백마성 지역으로 불린다. 이곳에는 독특한 정자가 있는데, 마령면 수선루다. 자연 상태의 암굴을 활용해 지은 2층 누각이다. 우애가 돈독하고 학문이 높은 연안 송씨 4형제가 조상의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바위 동굴을 활용해 지은 누각이기에 안에 들어가면 굴 속에 있는 듯하다. 또 백운면 영모정은 효자 신의연을 기리는 정자로 팔작지붕 위에 돌 너와를 사용한 점이 색다르다.

차를 몰고 진안을 찾는다면 부귀면 메타세쿼이아 길을 추천한다. ‘S’ 자로 굽은 길에 서 있는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이루는 풍경이 드라이브 코스로는 제격이다.

진안=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