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동갑내기 전경이 쓴 ‘1987년’ 그 날의 기록

“민주화위해 숨진 이한열… 마음의 빚 여전” / 연세대 시위진압 그물조 투입 / 시위중 이 열사 최루탄에 맞아 / “살려 내라”함성 귓가에 울려 / 본의 아닌 진압해야 했던 시기… 쓰라린 마음 담아 메모장 적어 / 이한열기념회 7일부터 특별전
1987년 6월9일, 전투 경찰로 복무 중이던 A(51)씨는 최루탄을 맞고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 연세대 앞 시위 현장에 있었다. 이 열사의 장례식이 열리기 하루 전인 같은 해 7월8일 그는 당시 현장 상황을 6장의 메모로 정리했다.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진압해야 하는 전경으로서의 고뇌 등을 담은 일기를 1988년 3월20일부터 2014년까지 썼다.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오는 7일부터 여는 특별기획전에 선보일 메모와 일기장은 당시 시위 현장을 전경이 증언하는 첫 사례다. 사진은 이한열기념사업회가 제공한 일기, 메모를 촬영한 것이다.

인천에 사는 평범한 가장 A씨는 1986년 군에 입대했다. 전두환 정권 서슬이 시퍼렇던 그 시절, 그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전경으로 강제 차출돼 집회·시위 현장에 투입되며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 대회’가 열린 이듬해 6월9일. 연세대 전담반이던 A씨는 서울 연세대 정문 앞에 ‘그물조’로 투입됐다. 맨 앞에서 성인 남성 키의 두 배가 훌쩍 넘는 그물을 들고 학생들이 던지는 돌 등을 막아 냈다. 고참병들은 이들 뒤에서 학생들을 향해 최루탄을 쐈다. 이한열 열사(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는 이날 시위에서 머리에 직격으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 열사에게 누가 최루탄을 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A씨가 잠깐 휴가를 나온 사이,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 열사는 7월5일 숨을 거뒀다. A씨는 이 열사의 장례식 전날인 7월8일, 성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에 당시 상황을 복기하며 심경을 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987년 6월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현장에 있었던 전경 출신 A씨가 이듬해 3월 그날 상황을 복기하며 쓴 일기. 피를 흘리는 이 열사의 모습이 담긴 신문 사진이 스크랩돼 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재문 기자
A씨는 1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수많은 전경이 몸에 화염병을 뒤집어쓰고 불구가 됐다”며 “이 열사처럼 시위하다 희생된 학생들과 함께 전경들도 ‘시대의 희생자’”라고 강조했다. 그는 군 입대 전 시위에 참가한 적은 있지만 열성적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어 “당시 검찰 조사를 받았던 (최루탄) 사수들이 ‘검찰에 가 커피 한 잔 마시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이에 대해 “당시 검찰이 최루탄을 쏜 것으로 의심되는 경찰들을 불러 조사한 게 너무 무성의하고 형식적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두 아들을 둔 A씨는 훗날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기 위해 전경 복무 시절 경험과 소회를 틈틈이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일기가 언젠가 이 열사를 추모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고 30년간 보관해 왔는데 올해가 바로 그때인 것 같아 사업회를 통해 공개하게 됐다”며 “내 앞에서 쓰러진 이 열사의 희생에 대해 항상 마음의 빚을 진 채 살아왔는데 마음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게 돼 다행”이라고 털어놨다.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현장에 있었던 전경 출신 A씨가 이 열사 장례식 전날인 1987년 7월8일 쓴 6장짜리 메모의 일부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재문 기자
◆1987년 7월8일


두려움이 앞선다. 너무도 엄청난 역사의 현실 앞에서 감히 몇 자 적으려니 무서움이 밀려온다. 며칠 전 죽은 한열이는 광주 사태를 무심히 지나쳐 버린 중학 시절이 부끄럽다고 그의 일기에 적었다.

그날(1987년 6월9일)! 한 학생이 우리를 보고 소리쳤다. 지금 너희가 쏜 최루탄에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부끄럽다. 우리(전경)의 의도는 아니지만 최루탄을 쏴야 하고 학생들이 다치는 일이 생기는 건 개개인 전경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다. 과연 우리의 민주화는 이루어질 것인가!

바야흐로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은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만만한 힘이 생겼다. 이 귀중한 기회는 노태우씨가 선물로 준 것도 아니고, 김영삼·김대중씨의 처절한 투쟁에 의해서만 얻어진 것이 결코 아님을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순수한 애국심의 학생과 종교인, 재야 세력들의 충정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우리네 중산층의 목소리와, 용기와, 투쟁의 결실이 가장 컸음을 아무도 부인할 순 없다. 국민이 호응하지 않는 시위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1987년 5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당시 전경 출신 A씨의 동료가 찍은 것으로, A씨가 구매해 갖고 있다가 30여년만에 공개했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재문 기자
◆1988년 3월21일 ‘6月의 함성’


87년 6월. 연세대 정문 앞에서 살다시피 하게 됐다. 매일 시작도 끝도 없는 그들과의 싸움. 돌멩이와 최루탄과 자동차 경적 소리, 구호 소리 뒤범벅이 되면 난 온몸의 허탈함과 절규하듯 나라가 이렇게 나가선 안 된다는 울부짖음을 토해내기도 한다. 시커먼 방독면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흐를 때도 많았고 또한 격한 분노로 그들과 맞서 욕설과 돌팔매 싸움을 하기도 한다.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그을린 동료를 보기도 하고 최투탄에 맞아 쓰러지는 이한열이도 보았다. 그 사건이 온 나라를 진동시킬 줄은 몰랐다.

그해 6월. 민정당 대통령 지명 대회와 맞서 6·10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이 시작됐다. 자칫하면 죽는 전경도 수도 없는데, 두려움과, 나라에 대한 걱정과, 나에게 돌을 던져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서 6월 한 달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밤 열한 시, 열두 시가 지나 내무반에 돌아와 깨스로 뒤범벅된 머리와 얼굴을 물로만 적시고 모포 위에 누웠을 때 우린 언제나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도 무사했구나. 내일은 어디로 가게 될까!”

6월29일! 휴가를 나와서 가게 안에 조간 호외가 보였다. 노태우씨, 직선제 수용! 김대중씨 사면 복권. 전국의 시위는 하루아침에 가라앉았고 학생들은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우리 중대는 전혀 숨 돌릴 틈이 없었다. 이한열 사건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연세대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시작됐고 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루탄을 쓰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 장례식은 100만 인파가 모였고 서울의 하늘 아래엔 한열이에 대한 시위 구호만 무성했다. 우리 대원들은 경찰서 습격 정보 때문에 모두 지키고 있었다.

1987년 5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과 전경들이 대치하고 있는 모습. 당시 전경 출신 A씨의 동료가 찍은 것으로, A씨가 구매해 갖고 있다가 30여년만에 공개했다. 학생들이 던지는 돌 등을 막기 위한 그물을 든 전경들 뒤에 최루탄 발사기로 학생들 쪽을 겨냥하고 있는 전경들의 모습이 보인다(사진 가운데). A씨는 사진 밑에 “왜 막아야 하는지,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 채 ‘로마의 병정’처럼 서 있었다”고 썼다.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이재문 기자
◆1988년 3월22일 침묵 속의 ‘눈’들이


1987년 6월 항쟁 때 전투 경찰! 우린 과연 더 큰 어른이 되어 무어라고 역사 앞에 증언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나의 역사를 적어 놔야 한다. 나의 정신세계만은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는 모습을 남기고 싶은 거다. 겉으로 드러내 놓지 않은 나의 마음속에 ‘침묵의 눈’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1988년 3월 ‘이한열’은 저 하늘로

87년 6월9일! 6·10을 하루 앞두고 전국의 대학들이 동시에 출정식을 가졌다. 시청으로 가자! 당연히 연세대에서도 출정식을 하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그때의 상황이야 지금 상세히 기억해낼 순 없지만 그날 한열이는 우리의 눈앞에서 쓰러져 갔다. 당시 44·45중대가 정문을 담당해서 SY44탄(최루탄)을 동시에 쐈다. 한 개 중대에 사수가 15명 정도가 되니까 약 30명이 함께 쏴서 그중 한 발 정도가 너무 각도가 낮았는지 한열이의 머리에서 터진 것이었다. 격동의 한 시기에 나와 직접 연관된 굉장한 사건이 되어 버렸다. 아직도 9개월 전 그때 함성들이 머리를 울린다. “민주를 사랑하는 한열이를 살려내라.” 우리들 다리를 부여잡고 친구를 살려내라고 피를 토하듯 울부짖던 그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