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6-12 21:21:19
기사수정 2017-06-12 21:21:16
정체성 찾기 앞장서는 윤범모 교수
중국 베이징의 789거리와 일본의 예술섬 나오시마 등 세계 미술현장을 찾았을 때 자주 마주친 인물이 있다. 동국대 미술사학과 윤범모(66) 석좌교수다. 그는 10년간 오지여행도 했다. 88서울올림픽 이전 3개월간 중국대륙을 누빈 것이 계기가 됐다. 백두에서 티베트까지의 여정으로 타클라마칸사막과 몽골의 고비사막에도 발걸음을 했다. 작가 10명과 한 달간 오지체험에 나서기도 했다. 작가들에겐 상상밖 풍경에 세상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고 예술세계는 풍요로워졌다.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면서 동시에 비평과 전시기획에까지 손을 뻗쳤다. 학문적 경향에서도 고대에서 현대까지 종횡무진, 좌충우돌하며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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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오시마 지추미술관을 방문한 윤범모 교수. 지추미술관은 지하에 있어도 자연광을 받아들여 시간에 따라 작품이 달라 보이는 것이 매력이다. 클로드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3명의 작품만 전시하고 있다. |
지난해 23년 재직했던 가천대(옛 경원대)에서 정년퇴임한 윤 교수가 최근 한국미술사 연구성과를 담은 논문들을 모아 ‘한국미술론’(칼라박스)을 펴냈다. 30여년간 발표한 주요 논문 20여편을 모아 엮은 책으로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한국미술사를 종횡무진한 연구역정을 고스란히 살펴볼 수 있다.
“원로 작가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증언할 유족마저 사라지는 걸 보며 이걸 해야겠다고 시작한 것이 근대미술연구였다. 그렇게 하다 보면 또 다른 빈자리가 보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좌충우돌했다.”
그는 늘 현장과 유리되지 않는 학자였다. 3년 전 광주비엔날레 창설 20주년 기념 특별전에선 홍성담 화백의 걸개그림 ‘세월오월’이 대통령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작품 전시가 유보되자 책임 큐레이터였던 그는 과감히 사퇴를 선택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꼭 필요한 거리가 없으면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함께 있기 위해선 어느 정도 관용과 양해가 필요하다. 관용과 양해는 각자의 마음속에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고독한 오지여행을 즐기는 이유도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사실 고독은 개인의 자유에 필요한 최우선 조건이다. 자유는 자유로운 사고에서 비롯되게 마련이다.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옮음과 그름,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틀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할 때는 독립적인 사고의 여지를 남겨두고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최고의 선택에 이르게 된다.”
특히 어떤 이념이나 사조, 유행, 열광이 밀려들 때는 고독만이 그 사람을 자유로울 수 있게 한다. 예술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한국미술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양적 팽창에 비해 질적 수준이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연간 1만 건 이상의 전시회가 개최되고 있으나, 사실 볼 만한 전시는 손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극소수다. 창작 발표라기보다 자원낭비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혹평할 수 있다. 대관료만 내면 전시할 수 있고, 또 대관전시로 미술계에 등단하는 구조, 이런 도떼기시장 같은 미술계 관행은 커다란 문제다. 성격 없는 전시, 독창성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그는 미술품의 장식화 내지 상품화 일변도에 문제를 제기한다. 미술의 사회적 기능을 제한시키는 것이기에 그렇다.
“그 여느 때보다 상상력과 시대정신, 독창성 등의 키워드가 중요한 시대다. 작가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하나, 그런 경우가 드물어 걱정이다. 무슨 장기자랑 출전선수처럼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묘사했지, 작가 자신의 독창적 철학이 없다. 소통구조를 외면하고, 상상력과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무슨 걸작을 꿈꿀 수 있겠는가. 치열한 작가정신이 아쉬운 때이다. 진정한 작가를 만나기 위해 대낮에도 등불을 들어야 할 판이다.”
그는 미술비평이 죽어가고 있다고 한탄했다.
“사실 오늘의 미술계에 비평가가 존재하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비평의 부재는 창작의 부실과 미술계 부작용으로 연결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비평가 지망생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큐레이터 지망생은 많아도 비평가 지망생의 부재는 한국미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비평활동의 무대도 좁지만 무엇보다 생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악조건을 외면할 수 없다. 작가를 상대하는 미술상은 넘쳐도 이론가를 위한 배려는 바닥 수준이다. 출판시장도 학술서는 외면하고, 허접한 대중용만 판을 치고 있는 구조다. 본격 미술출판을 위한 지원정책이 아쉽다. 현장을 떠나고 있는 미술 이론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가슴이 아프다.”
그는 한국미술의 국제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정체성 확보를 위한 치열한 행동을 요구한다.
“서구 추종만이 능사가 아니다. 어디서 본 듯한 비슷한 작품들의 난무, 이제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책거리 그림이 해외에서 주목받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독창성과 상징성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지 않아도 영세한 미술시장이다. 악순환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부 문화정책의 획기적인 전환도 절실하다. 창작지원 정책을 비롯한 시장개선 등 다양한 정책으로 문화예술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역할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한국미술계가 역동적이지 않고 미술시장이 불황의 늪에서 헤매고 있다면, 과연 국립현대미술관은 편할 것인가. 한마디로 우리나라에 ‘뮤지엄 작가’가 존재하는가. 화랑가에서는 외면받고 있으나, 대중적이기보다 실험적이고 치열한 작가는 누가 조명해야 하는가. 만약 국립현대미술관이 체계적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정리하는 특별전을 체계적으로 개최했다면, 오늘날처럼 이른바 ‘동양화 시장’의 몰락은 자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필묵 전통의 몰락,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인력과 역량 부족이라면 과감히 외부 기획자의 아웃소싱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도 맡고 있는 그는 요즘 11월 베트남 호찌민시에서 개최할 엑스포 행사를 준비하느라 바쁘다. 100억원 예산의 대규모 행사다. 한류의 해외종합행사라 할 수 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오늘도 한국미술관련 집필노동을 천형(天刑)으로 삼고 있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wansi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