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미의영화산책] 포스트휴먼 시대의 고민

인공지능(AI) 음성인식 디바이스 광고가 TV에 등장해 포스트휴먼 시대를 실감하게 한다. 끝없이 학습하고 성장·발전하는 AI 광고 속 AI 운영체제(OS)는 기러기 아빠의 다양한 요구사항을 해결해 주기도 하고, 퇴근하면 반갑게 맞이하며 가족을 대신하는 기능을 한다. 바쁜 워킹맘 대신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대화상대가 돼 주기도 하는 디바이스는 어느새 아이의 친구가 됐고, 아이는 배낭에 디바이스를 넣고 유치원에 가기도 한다. 공상과학(SF)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상황이 이제 일상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현대인의 외로움,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 상황을 보다 편리하게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가까이 다가온 스마트한 삶과 함께 AI와 인간의 경계가 사라지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고민도 함께 등장했다. 스마트기기가 인간의 많은 면을 대체할 때,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어떻게 규정 가능한가. 이제 AI가 소설도 쓰는 마당에 인간의 창조성을 넘볼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영화 ‘그녀(Her)’(감독 스파이크 존즈)는 다가올 2025년을 상정하고 음성인식 OS인 사만다(스칼렛 요한슨)를 인간처럼 생각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는 테오도르(호아킨 피닉스)의 이야기를 통해 AI가 인간과 깊은 감정을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내와 성격 차이로 이혼하고 외로운 상황에서 접하게 된 사만다와의 교류는 편지 대필업무가 직업인 테오도르에게 일을 재빨리 처리해주는 것은 기본이며, 달콤하고 상냥스러운 목소리로 사랑이 시작될 때의 행복감도 흠뻑 느끼게 해준다.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
이 영화는 OS 와의 사랑을 마치 일반 멜로영화의 진행과정처럼 보여준다. 사랑에 빠진 행복한 시간 이후에 진행되는 상처 입고 헤어지거나 더욱 깊은 서로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과정 말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에게 깊이 빠져 행복감에 충만했을 무렵, 갑자기 사만다와 연락이 두절되자 그는 마치 금단현상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중에 연결이 된 사만다는 업데이트 중이어서 접속이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는 둘이 대화할 때도 다른 몇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사만다는 8000여 명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와도 사랑에 빠졌냐고 묻자 사만다는 641명이라고 말한다. 테오도르는 그제서야 사만다가 OS인 것을 확실히 깨닫고 깊은 슬픔에 빠진다.

영화 속 이야기지만 광고에서 보듯이 인간과 깊은 감정적 교감을 나누는 AI 음성인식 디바이스는 먼 미래에서나 생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AI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포스트휴먼은 점점 인간을 닮아가서 인간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이며, 급기야 인간을 조종하는 위치에까지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포스트휴먼 시대일수록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어떤 환경이든 인간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야 하며, 행복을 만들어내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황영미 숙명여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