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2017-07-01 11:00:00
기사수정 2017-07-01 09:50:35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2013년 3차 핵실험 전까지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앞세워 한국과 미국을 위협한 적이 별로 없다. 무수단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이나 KN-08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북한군 열병식에 등장하긴 했지만, 이 미사일들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무기고에 보관된 채 미국과의 정치적 대결에서 카드로 활용됐을 뿐 실제로 발사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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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5월 14일 시험발사한 화성-12형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지상에서 발사되고 있다. 연합뉴스 |
하지만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시대가 본격화된 2013년부터 북한은 김일성 주석 시절부터 확보해온 모든 종류의 미사일과 로켓을 총동원해 한국과 미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스커드와 노동미사일, 프로그 로켓, KN-02 단거리 탄도미사일, 300mm 방사포, KN-06 지대공미사일, KN-01 대함미사일, 북극성 계열과 화성-12형, 무수단 미사일 등 그 종류만 해도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그런 북한이 6월 중순부터 잠잠하다.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매주 최소 한 번씩 미사일을 발사하며 장관 인선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새 정부를 거칠게 압박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1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의식한 듯 도발을 자제하는 대신 관영 매체와 선전기구들을 동원해 대남 비난을 이어가던 북한이 한미 정상회담 직후 미국의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선에서 미사일 도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 남은 건 ICBM뿐…화성-12형 이용한 도발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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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탄도미사일 발사훈련을 참관하면서 모니터를 통해 훈련상황을 점검하고 있다. 노동신문 |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 열병식에 등장했던 북한 전략군의 미사일 가운데 실제로 발사되지 않은 것은 2종의 ICBM 뿐이다. 둥근 모양의 발사관 때문에 미사일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북한이 위성 발사체라 주장하는 은하-3호 발사 이후 ICBM 개발에 필요한 기술은 차곡차곡 쌓여왔다. 그 결정체가 바로 5월14일 발사된 화성-12형 탄도미사일이다.
화성-12형은 미국 본토를 공격할 미사일을 갖겠다는 북한 정권의 목표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미사일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은 최근 수년 동안 비행거리를 미국쪽으로 확장해왔다. 북극성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그 개량형인 북극성-2형이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 괌 등을 사정권에 넣는다면 사거리가 4000~5000㎞로 추정되는 화성-12형은 알래스카 서부 일부까지 비행할 수 있다. 탄두 중량을 줄여 비행거리를 늘리는 트레이드 오프(trade-off)를 적용하면 ICBM의 최소 기준인 5500㎞를 넘어설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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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노동신문이 김일성의 105번째 생일을 맞아 4월 15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진행중인 열병식에 신형 ICBM으로 추정되는 미사일을 처음 공개했다. 연합뉴스 |
북한이 개발한 탄도미사일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확보한 화성-12형은 ICBM으로 발전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화성-12형에 장착된 엔진은 지난 3월18일 지상분출시험에 성공한 일명 3.18 엔진. 80tf(톤포스: 80t 중량을 밀어 올리는 추력)짜리 액체연료 엔진인 3.18 엔진에 미사일의 방향 등을 제어하는 3tf짜리 보조엔진 4기가 장착되면 100tf가 넘는다. 이 엔진은 러시아가 사용했던 RD-250 엔진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국영 우주로켓 제조업체 유즈마쉬에서 생산된 RD-250은 1965년 처음 등장했다. 러시아의 SS-18 ICBM을 상업용으로 개조한 싸이클론 로켓에 사용됐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구형이지 신뢰성이 높고 다른 최신형 엔진보다 입수하기 용이하다는 점에서 북한에게는 활용가치가 높다.
‘북핵 불용’ 원칙을 고수하는 한미 양국을 압박하기 위해 북한은 화성-12형을 이용해 ICBM 개발능력을 과시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화성-12형을 1967년 러시아가 실전배치한 SS-11(러시아명 UR-100) ICBM처럼 2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SS-11 1단 추진체의 추력은 88.8tf로 화성-12형보다 다소 낮지만 전체적으로는 1만㎞를 비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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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3월18일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참관했다고 조선중앙TV가 19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
최근 미국 정보당국은 북한이 소형 로켓엔진 지상분출시험을 실시한 정황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소형 로켓엔진 지상시험이 성공하면 북한은 화성-12형에 탑재해 2단 형태의 미사일을 만들어 시험발사를 시도하며 한미 양국을 거칠게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 비행거리까지 발사하면 미국의 군사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을 감안, 1단 추진체 연소가 종료되고 2단 추진체 분리 및 엔진 점화 단계에서 엔진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한 뒤 자폭시킬 가능성이 있다. 90도에 가까운 고각발사를 통해 재진입체 기술검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이미 북한은 화성-12형 발사 당시 고도 2111㎞까지 미사일을 쏘아올린 경험이 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던 ICBM을 확보했다는 과시에는 부족함이 없다.
◆ 北 미사일의 숨겨진 약점은 김정은 본인?
북한이 탄도미사일 발사를 보도할 때 ‘전략 탄도미사일’이라는 용어가 종종 등장한다. 러시아 기준으로 사거리 1000㎞ 이상의 미사일은 전략 탄도미사일로 분류된다. 북한 역시 화성-12형이나 북극성-2형 등을 전략 탄도미사일로 부른다. 그만큼 국가적 측면에서 전략적 의미가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는 말처럼, 탄도미사일과 같은 전략무기는 기술적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 국익을 극대화하는가에 대한 의미도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탄도미사일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체계적인 전략이 필수다. 파키스탄은 자국의 핵과 미사일 사용 전략을 인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용도로 규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무기들을 확보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북한 전역을 타격하기 위한 미사일 운용전략을 갖고 있다. 상황에 따른 차이만 있을 뿐, 자국의 위협을 정밀분석해 섬세한 전략을 수립, 운용한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반면 북한의 핵, 미사일 전략은 명확한 것이 없다. 지난 2월부터 지금까지 북한이 시험 사실을 공개한 미사일은 북극성-2형 준중거리 탄도미사일, 화성-12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스커드-ER 탄도미사일, KN-06 지대공미사일, 신형 지대함미사일, 스커드 개량형 정밀유도 탄도미사일이다. 사거리 1000~5000㎞ 수준의 이 미사일들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은 한국과 일본, 미국을 모두 압박하는 모양새다. 대북 제재에 동참하지만 각각의 정치적 입장이 조금씩 다른 한미일 3국을 ‘선택과 집중’이 아닌, 똑같은 방식으로 압박하는 것이다.
획일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선택과 집중의 원칙도 지키지 않다보니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전략적 메시지도, 날카로움도 없이 기술적 능력 향상이라는 의미에 그친다. 전략무기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특정 상황과 시점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사안을 선택해 거기에 집중함으로서 전략적 효과를 높여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충남 안흥시험장에서 실시된 현무-2C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참관한 것도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일어날 수 있는 북한의 도발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 좋은 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날카로움을 보이지 못한다. 관영 매체들이 총동원돼 한국과 미국을 향해 거친 언사를 퍼붓고 사진과 동영상을 공개해도 정작 당사자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높지 않다. 눈을 가린 채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니 상대방이 그를 두려워하겠는가. 상황을 분석해 북한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 제시할 의무가 있는 참모들은 김 위원장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두 손을 모으고 눈치 보기에 급급하다. 문재인정부를 압박해 남북관계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남한을 공격할 수 있는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집중하거나, 미국 핵항공모함의 접근을 막기 위한 거부적 억제 전략을 쓰거나, 트럼프 미국 행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가능한 멀리 미사일을 쏘아올리는데 집중하는 방법 등 상황에 따른 다양한 전략 구사가 가능하다.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올인해도 북한이 원하는 전략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의문인데 김 위원장은 모든 종류의 미사일을 쏘아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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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4월 15일 김일성 생일 105주년 열병식에 앞서 김정은 위원장에게 행사안내 책자를 전달하고 있다. 연합뉴스 |
소 잡는 칼로 닭 잡는 결과를 초래하는 이같은 상황의 근본적 원인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있다. 절대권력을 틀어쥐었다고 하나 그의 나이는 아직 30대 초반이다. 20여년을 후계자 수업을 받으며 정치감각을 키운 아버지와 항일 운동을 거쳐 북한 정권을 수립하고 주체사상을 확립한 할아버지에 비하면 경험이 없다시피하다. 세심한 정략이나 전략을 만들고 참모들에게 제시할 경륜은 부족하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아버지에게서 후계자로 지명된 인물이다. 기본 능력은 있다는 뜻이다. 북한 탄도미사일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기술적 능력을 향상시키듯, 김 위원장도 경험을 통해 핵과 미사일 전략을 날카롭게 다듬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5월 노동당 7차 대회 결정서에 포함된 ‘침략적인 적대세력이 핵으로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한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구절은 그 전조다. ‘자주권 침해’라는 모호한 개념을 앞세워 핵 선제공격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북한의 KN-08과 KN-14 ICBM, 화성-12형 미사일의 탄두부 모양이 서로 다른 것은 핵미사일 개발의 최종 단계인 대기권 재돌입체를 완성하려는 기술적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본토에 핵탄두를 한 발이라도 떨어뜨리겠다는 북한의 의지가 기술 향상과 함께 ‘자주권 침해’라는 전제조건을 핵전략으로 구체화해 실천에 옮겨지면 트럼프 행정부는 어떻게 반응할까. ICBM 완성이 눈앞에 다가온 지금,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핵, 미사일)을 가지고 인생 최대의 도박에 나선 김 위원장의 선택에 따라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정세도 요동칠 전망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